#1화. 이별 후에

“주형아,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언젠가 하겠죠.”

이제 갓 서른이 된 나에게 명절은 이렇게 힘들다. 태연한 척 친척들 앞에서 웃으면서 받아 넘겼지만 속은 만신창이였다. 난 이틀 전 이별을 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8년 동안 만난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결혼할 생각이 들지 않는단다.

개새끼.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기대하던 것이 있었다. 내가 서른두 살이 되면, 그러니까 우리가 만난 지 10년이 되는 날 예쁜 반지와 함께 프러포즈를 받을 줄 알았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러나 2년 정도를 남기고 그 꿈은 무참히 깨져 버렸고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

“알았어, 얼른 들어가. 엄마 일찍 가서 미안해….”

친척들도 불편하고 늦게 가면 차 막힌다는 핑계로 서둘러 본가를 나왔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아, 집에도 들어가기 싫다. 그러나 지금은 연휴였고 같이 맥주 한 잔 마실 친구도 구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느껴졌지만 편의점 맥주로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자취방에 홀로 앉아 마시는 맥주는 생각보다 술술 넘어갔다. 헤어질 때 욕이라도 왕창 해줄걸… 물이라도 뿌릴걸… 아님 뺨이라도… 하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헤어진 내가 바보 같았다. 더 이상 널 보면 설레지 않아. 우리가 너무 오래 사귀었나 봐. 라고 말하는 남자 친구의 말에 화나고 불쾌하기보다 씁쓸하고 마음이 아팠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어느 순간부터 설렘이 사라진 것 같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사귀다 결국엔 결혼하겠지…라고 생각했었지 그렇게 이별을 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잉.

아, 술이 너무 달았나 보다. 대체 몇 캔을 마신 거지… 내 주량을 훨씬 넘긴 음주는 나에게 숙취를 선물했다. 전화가 오는 것 같아 휴대폰을 찾아야 하는데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누군가 뒤에서 내 등짝을 내리친다면 바로 토할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지잉 지잉.

진동은 계속 울리는데 대체 휴대폰은 어디 있는 거야!

한참 만에 침대와 벽 사이에 끼여서 울고 있는 휴대폰을 발견하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니! 집에 왔어?”

“해민아… 해민아….”

“언니 목소리가 왜 그래?”

“해민아… 흐윽… 나 어떡해… 흐윽… 흡… 허엉엉.”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크게 울어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 몇 안 되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여서 그런지 해민이의 전화를 받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3일 동안 쌓여 있던 설움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전화를 받고 놀란 해민이는 곧바로 내 자취방으로 온다고 했고 15분쯤 지났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사는 게 이럴 때 좋구나.

“언니 왜? 무슨 일 있어?”

문을 열자마자 놀란 토끼 눈을 한 해민이 얼굴이 보였고, 그 밑으로 수면바지에 패딩 하나를 대충 걸친 모습이 보였다. 너 진짜 급하게 와줬구나… 다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하자.”

-

“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냐? 이제 와서 헤어지자고?”

“응 헤어지자더라. 붙잡기도 싫고 해서 그냥 나왔어.”

“장담하는데 안재혁 그 새끼 바람난 걸걸? 갑자기 헤어지자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선배한테 그 새끼가 뭐야, 아무리 그래도 대학 모임 나가면 얼굴 부딪칠 사인데….”

“됐고! 그 새끼가 언니랑 결혼 못하겠대?”

“어. 선배도 이제 서른둘이고, 집에서 결혼하란 소리가 많았나 봐.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나랑 연애는 해도 결혼은 못하겠대. 자기는 설렘이 없는 여자랑은 결혼하기 싫대.”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해민이는 곧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해민이의 반응은 익히 예상했던지라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선배가 나에게 젠틀하게 이별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봤는데 넌 요리도 못하잖아. 난 밥도 못 얻어먹는 남편은 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