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헤어지자고.”'류하는 재경의 말에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데이트까지 잘 하고, 결혼 날까지 잡고 있던 판국에 갑자기 헤어지자니?'“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혼수가 너무 많아? 좀 줄이자고 할까?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너무 많았어. 이건 아니지. 네가 나랑 결혼 하러 오는 거지, 우리 집에 기부하러 오는 거 아니잖아.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심했네.”'“그런 거 아니야.”'재경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류하를 쳐다봤다.'“우리 두 사람 안 맞는 것 같아. 그 동안은 억지로 당신에게 어울린다고, 맞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안 될 것 같아. 지금 미루지 않으면 우리 두 사람 모두 후회할 거야.”'“싫어.”'류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서른 인생에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여인이었다. 가장 소중하다고 믿었기에, 가장 오래 지켜주고 싶었던 여인이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연애도 했고, 그래서 결혼도 하자고 말을 했었다. 그런 여자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다고? 류하는 용납을 할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뭐가 불만인 건데?”'“불만은 없어.”'“그런데 왜 파혼을 하자는 거야?”'“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평소의 재경과 달랐다. 그래서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명확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속을 알 수 없는 재경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더욱 속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했다. 마치 꽁꽁 싸인 무언가가, 그냥 그 자체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다시 안개에 감춰진 느낌이었다.'“너 이러면 내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네가 왜 그러는 건지 말을 해야 나도 뭘 할 거 아니야.”'“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당신이랑 더 이상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재경아.”'“류하 씨랑, 좋았어. 그래 인정해. 안정적인 집안이고, 류하 씨도 내게 너무나도 헌신적이야. 하지만 그 이상 당신에게 끌리는 것이 없어. 짜릿하고, 막 그런 것도 없단 말이야. 류하 씨 너무 미안한데. 우리 아니야. 이 상태로 계속 가면 서로에게 더 안 좋을 뿐이야. 여기서 끝내는 게, 딱 여기서 끝을 내는 것이 우리 두 사람에게 더 좋을 거야. 류하 씨도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아니, 몰라.”'광화문 광장,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둘에게로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서로에게 더욱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세상의 중신에는 오직 두 사람 뿐이었다.'“결혼까지 하기로 한 여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가 알기에 대한민국에, 아니 전 세계에 그런 남자 하나도 없을 거야.”'“그런 남자 없어.”'“그런데!”'류하의 고함에 재경이 살짝 미간을 모았다.'“사람들 쳐다 봐. 이런 식으로 구는 건 당신과 어울리지 않은 짓이야.”'“나 다운 짓이 뭔데? 재경아. 너 똑바로 말을 해. 우리 어머니 때문이니? 우리 어머니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거지? 우리 어머니가 너 자꾸만 힘들게 해서, 그래서 나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거지.”'“단순히 그런 건 아니야.”'“그럼?”'재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답답했다. 이 남자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지금도 답답했다.'“당신이라는 사람에게도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단 말이야. 지금은 좋을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 당장 좋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건 아니잖아. 미래도 봐야 하는 거고, 더 많은 것도 생각을 해야 해. 하지만 지금 당장 더 이상 당신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아. 딱, 딱 여기서 끝일 것만 같아.”'“재경아.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지 네가 마음을 열까? 이런 식으로 굴지 마. 네가 이러면 나 속상해.”'“속상할 필요 없어.”'재경은 옷깃을 여미었다. 광화문 광장은 꽤나 쌀쌀했다. 12월 중순, 이별을 고하는 장소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재경은 속으로 자신을 자책하며 가만히 류하의 눈을 들여다봤다. 참 따뜻한 눈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는 류하였기에 더더욱 미안한 마음도 드는 그녀였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서류하,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재경은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계속 그에게 매달리는 것 역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류하에게 그리 좋은 여자가 아니었다. 류하가 자신에게 좋은 남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딱 그 만큼, 아니 그것의 반이라도 그에게 좋은 여자였으면 좋았겠지만, 재경은 류하에게 늘 부족한 여자일 뿐이었다. 세상도 알고, 그녀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 류하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서류하라는 남자에게 너무 버거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숨이 턱턱 막혀.”'“그 숨 막히는 거 내가 도와준다고.”'“당신이 어떻게? 당신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당신이 어떻게 나를 도와! 우리 두 사람 아닌 거야. 애초에 아니었던 걸 억지로 끌고 온 거란 말이야. 우리 두 사람이 아니라는 거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이야기를 끌려고 하니? 헤어지자는 거야. 여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이미 속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꺼내는 말이라고.”'“헤어지자는 말이 너는 쉽니?”'“안 쉬워. 너무 힘들어. 너무 아프고, 너무 괴로워. 그러니까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심장이라도 꺼내고 싶었다. 속이라도 뒤집어 보이고 싶었다. 이별이 쉽다고? 절대로 쉽지 않았다. 지금 재경의 마음은 그냥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류하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류하의 마음이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재경의 마음처럼 아플 수는 없었다. 류하는 강한 사람이었다. 재경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어느 정도 감당을 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이별이라는 거 절대로 쉽지 않아. 그래서 나도 되게 많이 고민을 했어. 이대로 그냥 결혼을 할까도 생각을 했어.”'“그런데?”'“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결혼이라는 거 당신하고 내가 행복하려고 하는 거잖아. 우리 두 사람이 이 상황을 피해보자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거잖아. 그런데 나는 안 그럴 것 같았어. 당신하고 못 그럴 것 같았어.”'“재경아.”'류하가 조심스럽게 재경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안아주고 싶은 가녀린 여자였다. 너무나도 약해서 보듬어주고 싶었다.'“내가 더 잘 할게. 우리 어머니 내가 설득할게. 그 양반이 그러시는 거 하루 이틀 아니잖아. 우리 사귀던 그 날부터, 계속 이렇게 구신 거잖아. 이제 와서 지치는 이유가 뭐야? 여태까지의 시간이 아깝잖아. 우리 두 사람 정말로 열심히 부딪혔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우리의 시간이 아깝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