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인대학병원 수술실 B rosette 3번방.'벽에 설치된 오디오에서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이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형외과 치프 레지던트 장인하가 수술실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서큘레이팅이 늘 틀어 놓는 음악이었다. 태양처럼 밝은 무영등이 펑 소리를 내며 켜지고, 그 눈부신 빛을 받아 도도하게 반사되는 수술기구들이 줄맞춰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멸균된 소독 시트로 덮인 환자 주위에는 삐, 삐 규칙적인 알람 소리를 내며 기계들이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그 남자, 인하는 수술대 앞에 담담히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술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이제 곧 수술을 시작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배 위에 두 손을 겹쳐 얹은 채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양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푸른색 마스크 안에 숨은 그의 표정은 지극히 고요하고도 평화로웠다. 수술 직전의 숨 막히는 긴장감이라곤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술 전이면 인하가 항상 잠깐의 명상을 하고 난 뒤 메스를 잡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아는 수술방 식구들은 잠자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날과 달리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늘의 수술은 겨우 일곱 살 난 남자아이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해도 마음의 부담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번쩍.'다음 순간, 그의 눈이 떠졌다. 칠흑같이 새카만 눈동자에 칼날처럼 예리한 빛이 스쳐갔다. 그가 조용히 오른손을 내밀고 입술을 달싹였다.'“메스.”'스크럽이 내민 메스를 받아든 그가 애달프게 가느다란 아이의 다리 위에 칼날을 가져갔다. 그 끝에 조금의 떨림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가 보조 의사와 마취의에게 눈짓을 했다.'“시작합니다.”'스윽.'그가 칼날을 횡으로 긋자 그 단면을 따라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메스를 내려놓고 어시스턴트에게 눈짓을 했다. '“보비(bovie).”'어시스턴트가 뜨거운 전기 바늘을 내밀고는 조심스럽게 혈관에 그 끝을 가져갔다.'찌찌직.'하얀 연기와 함께 살이 타는 노린내가 수술방에 확 퍼졌다. 혈관이 지져져 출혈이 멈추자, 예리한 칼날은 더욱 깊이 나아갔다. 켈리와 모스키토를 이용해 큰 혈관들을 결찰해가면서 마침내 골막까지 순식간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은 전기톱을 이용해 뼈를 자르는 일 뿐.'“쏘우(saw).”'“여기 있습니다.”'웽 하는 기계음과 함께 톱과 뼈가 부딪치는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끼리릭 끼리릭하며 귀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고, 그의 눈빛은 어떻게 보면 평온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남자아이의 다리가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절단된 다리를 한쪽으로 치워 놓고 살과 살을 당겨 단면봉합을 하려는데, 어디선가 숨 죽여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부터 옆에 서서 수술을 보조하던 여자 인턴 두 명이었다. 어제부터 정형외과 실습을 처음 시작했다던 애송이들이었다.'그가 쏘듯이 매서운 시선을 던지자, 그녀들은 입술을 꽉 깨물고 긴장을 하면서도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무리 철없는 인턴이라도, 수술실에서 훌쩍여 집도의의 수술을 방해했다는 건 꾸중을 듣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어쩌면 그대로 수술실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이 인하의 눈치만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려니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이리 와.”'그의 말이 떨어지자, 두 여자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인하의 무서운 카리스마는 정형외과에서도 유명했다. 제대로 걸리면 그대로 아작이 난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던 두 사람은 그의 얼음 같은 눈빛에 잔뜩 굳어 있었다.'“이름이 뭐야?”'“김설종입니다.”'“반항아입니다.”'그는 예쁘장하게 생긴 두 여자를 번갈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열었다.'“좋아. 김 선생, 반 선생. 잘 들어. 이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이 아이는 죽는다.” '골육종. '무릎에 생긴 괴물 같은 암 덩어리로 인해 허벅지 아래 다리 전체를 잘라내야 하는 아이의 불행한 운명. 그러나 그게 아깝다 머뭇거려 시기를 놓치면 순식간에 폐 등으로 전이되어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 잘라서 살 수 있다면 가차 없이 잘라야 했다. '“너희들이 정형외과를 지원할지 안 할지는 나와 상관없어. 하지만, 얼음처럼 냉정해질 자신이 없다면 두 사람, 앞으로 수술방에 들어오지 마. 차라리 수술 없는 내과나 정신과를 전공해.”'그는 그 말을 끝으로 봉합에 집중했다. 설종과 항아는 자신들의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 끝까지 수술을 지켜보았다. 맨 처음, 메스를 든 순간부터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인하의 섬세한 두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청산 고교. '재단법인 청산 학원에 속한 사립 고교였다. 화창한 봄 햇빛이 한가득 들어오는 1학년 교무실에 한 여선생이 앉아 있었다. 아담하고 가녀린 몸이었지만 박꽃처럼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여자, 이나비는 척 보기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는 그녀에게 체육과 김 선생이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청첩장을 쓱 내밀었다.'“이나비 선생님, 이거.”'“어머, 김 선생, 결혼해?”'요전까지도 그런 얘기는 없었기에 나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첩장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렇게 됐어요. 중매로 만났는데,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 호호호!”'연신 웃는 얼굴로 김 선생이 몸을 배배 꼬았다. 좋아서 입이 그대로 찢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저렇게나 좋을까. '“그랬구나. 정말 축하해.”'나비가 빙그레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녀의 속내는 어쩐지 우울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솔로대원이 빠져나간다. 그녀를 외롭게 버려두고.'“네, 고마워요. 아, 신 선생님, 청첩장이오!”'또 다른 표적을 발견한 김 선생이 표창이라도 던지듯 재빠르게 청첩장을 날렸다. 그 날카로운 기습에 아직 애인 없는 신유리 선생 역시 피가 흐르는 가슴을 그러쥐며 쓰러져야 했다. '“김 선생, 결혼하나 봐? 좋겠다…….”'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유리의 어투가 어지간히 만족스러웠는지, 김 선생의 콧날이 10센티는 하늘로 치솟았다.'“호호호! 우리 그이가 너무 서둘러서요. 이 선생님이랑 신 선생님도 어서 좋은 소식 있길 바랍니다. 오호호호!”'그리하여 그날 청산 고교에 적을 둔 선생 102명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조리 김 선생이 내민 고지서에 무릎을 꿇었다. 얼굴은 웃으며 축하한다 말하지만 속으로는 다들 쓰린 가슴을 어루만졌다. 결혼한 자들은 의외의 지출 때문에, 결혼 못 한 자들은 금전적 손해에다 자신보다 먼저 짝을 찾은 부러움까지 포함된 상처를 안고. '‘삼만 원은 적고 오만 원은 부담 돼. 왜 축의금은 사만 원은 안 되는 거야, 왜, 왜!’'바야흐로 꽃 피고 새 우는 결혼의 계절 3월. 나비는 이달 들어 네 장이나 쌓인 청첩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오만 원씩 네 장이니 이십만 원. 하아, 이번 달도 여행 경비 모으는 건 포기야…….”'나비가 책상에 턱을 괴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지출할 돈보다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 '‘김 선생이 부러워. 나도 결혼하고 싶단 말이야! ……일단 남자, 남자를 잡아야 해!’'방년 28세. 청산 고교 국어 선생 이나비. 스스로 보기에도 외모도 성격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놈의 괜찮은 남자가 씨가 말랐다. 아무리 둘러봐도 결혼적령기의 쓸 만한 총각이라곤 눈에 띄지가 않아 초조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옆자리에서 연이어 한숨을 쉬던 신유리 선생이 청첩장을 툭 내려놓으며 엎드렸다.'“며칠 전에 DSLR 카메라 산다고 백만 원 넘게 카드 그었는데, 아, 죽음이야!”'나비와 동갑이고 마음도 잘 맞아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 유리였다. '“그러게 뜬금없이 카메라를 사고 그러더니.”'나비의 타박에 유리가 입술을 쑥 내밀었다.'“히잉, 그땐 정말 DSLR 안 사면 죽을 것 같았어. 지름신이 목줄을 따려고 덤볐거든.”'“유리, 네가 사진을 알아? 웬 바람이 불어 그 비싼 카메라를 산다고 설치더라. 벌써 후회하지?”'계속된 구박에 유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후회 안 해! 나, 사진 동호회도 가입했어. 내일 주말이니까 출사도 나갈 거야.”'“그래, 그래. 잘 해봐. 열심히 찍어. 신유리 선생.”'나비는 열변을 토하는 유리에게 심드렁히 덧붙였다. 매일매일 느느니 한숨과 나이 뿐이었다. 괜찮은 남자는 정말 어디에 다 숨은 걸까? 그녀가 이렇게 애타게 찾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