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더운 7월의 여름, 그녀의 둘째 오빠는 그렇게 자신의 꿈을 좇아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휘이잉, 어디선가 이륙하는 비행기 소리가 들려오고 신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랗다.'“갈까?”'그의 말에 고개를 내린 신애는 뒤를 돌아 진이를 바라보았다. 인천공항, 육남매를 따라 우혁이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진이는 오랜만에 정장이 아닌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좀 그의 나이다워 보였다.'“야, 선우진. 신애가 왜 네 차를 타는데?”'그새 진이가 한 말을 들었는지 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불쑥 끼어들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지혁의 차에 올려 타려던 이난과 차혁이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고, 그 둘 옆에 서 있던 막내 유진은 멀뚱히 이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다.'“네 차는 벌써 만원이잖아.”'“아직 조수석 남았어.”'지혁이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겨우 차 타는 거 가지고 이렇게 난리라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도 없을 거다. 그런 지혁의 태도에 진이가 ‘흐음’ 하고 눈동자를 굴려 허공을 바라보고, 신애는 지혁이 주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 대답 없던 진이가 유혹이 다분한 미소를 짓더니 신애의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신애야, 누구 차 탈래?”'“으, 응?”'“네 오빠 차 탈래…….”'그리고 그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혁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씨익 웃었다. 지혁이 순간 흠칫한 건 두말하면 잔소리.'“……아니면 내 차 탈래?”'이거 완전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묻는 수준이다. “응? 신애야, 무슨 차 탈래?”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그가 얼굴을 들이 내밀자 신애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가 이 잘생긴 미소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웃음기가 가득한 그의 시선이 저렇게나 그녀의 반응을 즐기고 있을 리가 없다. 가만 보면 하는 짓이 여우가 따로 없다니까. 늑대가 아니라 여우. '한편, 신애의 표정 변화에 지혁이 눈썹 하나를 추켜세우고, 진이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쿡쿡 웃음을 흘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동시에 귓가로 다가오는 그의 붉은 입술. '“도망가자.” '“응?”'그리고 무슨 말인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가 붙잡은 손에 이끌려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 뭐라 소리치는 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런 오빠를 흘긋 뒤돌아보다가 신애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달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 뿐.'그가 변했다.'아버지의 기일이라 했던 그날을 시점으로 그는 알게 모르게 변했다. 어딘지 모르게 더 다정해지고, 표정 변화도 많아졌다. 덕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전과는 달리 그의 감정을 읽는 것도 수월해져서 정말 그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디 그것뿐인가? 성공적으로 마친 프로젝트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옛날처럼 여유로워진데다가 아까처럼 장난도 치고, 평창동에 가야지만 만날 수 있던 그가 이젠 가끔씩 그녀를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혹시,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전혀 기억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뒤로 특별히 언급하는 것도 없고. 그날, 그의 고백 아닌 고백에 그의 감정에 대해 확신이 들었지만 그가 술에 취해 있었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술 취할 때 말하면 뭐하는가. 그 중요한 걸 기억하질 못하는데다가 정신이 말짱할 때는 아무 말이 없는데. 혹시, 약혼한 사이여서 여유를 부리는 걸까? 그게 아니면…… 그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중? '흘금, 옆에서 운전하는 진이를 곁눈질하던 신애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그녀가 고백을 먼저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진짜 미나 말 대로 해야 하나? 신애는 며칠 전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뭐어? 약혼자?”'명동에 있는 어느 한적한 카페. 오랜만에 다시 만난 윤아와 미나는 너무 놀라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뒤에서 누군가가 망치로 내리친 기분이었다. 반면, 그들의 반응에 움찔, 몸을 들썩이던 신애는 미안한 듯 멋쩍게 웃으며 기다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친구들은 아직도 입을 다물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미안……이제야 말하게 됐네……말 안 하려고 한 건 아닌…….”'“자, 잠깐만……상황 좀 정리해 보자.”'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윤아는 다른 한 손을 신애에게 내밀며 잠시 제지를 걸었다. 너무 놀라서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이 이것 하나.'우리 얌전한 신애, 부뚜막에 먼저 올라갔네.'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호로록 내뱉은 윤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옆에 앉아 있는 미나는 아직도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13살이 되던 해에 후견인인 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는데…….”'“응.”'“그 할아버지가 당신네 손자, 그것도 당시 고등학생이던 19살짜리 남자애와 너를 억지로 약혼을 시켰다……이거지?”'“아니……뭐……정확히 말해선 ‘억지’는 아니지만……일단 그렇게 되겠지?”'“……그 할아버지 미친 거 아냐?”'그렇게 외치며 윤아가 테이블을 탕 내리치자 신애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유, 윤아야?”'“아니, 어떻게 갓 중학교에 들어간 애를 고등학생이랑 약혼을 시킬 생각을 해!”'그때 당시 지혁과의 반응이 똑같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흥분하는 윤아를 멍하니 바라보던 신애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친구가 고마워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것은 쓴웃음으로 변해 버렸다. '“걱정 마, 진짜 약혼 아니니까.”'“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