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권씨육남매 장녀이야기 1

“어떡해, 어떡해! 저기 지혁 선배랑 진이 선배 온다!”'“어디? 기지배들, 조금만 비켜봐! 나도 좀 보자.”'“어우, 밀지 마 다들!”'때는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12월 중순. 바람이 시리고 눈이 내리는 창백한 겨울의 아침, 목도리를 두르고 손난로를 비비며 수다를 떨던 여학생들 무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창문이 깨질까 무서울 정도로 바싹 달라붙은 여학생들은 오늘도 그들의 아침 등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겨울의 햇살을 맞으며 파란 교문을 통과하고 있는 두 남학생은 이 교내에서 유명한 죽마고우 권지혁과 선우진이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이목구비, 하얀 입김과 대조되는 까만 눈동자와 붉은 입술, 그리고 단단한 넓은 어깨. 단정한 교복 위로 입은 네이비색 코트와 그들의 까만 머리카락은 추운 날씨로 창백해진 그들의 뺨을 더 빛나게 해주고 있었고,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올 때면 창가에 앉은 여학생 무리는 환호성으로 들썩거렸다. 오늘 진이는 하얀색 목도리, 지혁은 여느 때처럼 카키색의 목도리다. 그들의 목도리 색으로 내기를 나눴던 여학생들은 키득거리며 서로의 옆구리를 찔러댔고 그렇게 한창 물오른 관찰을 계속했다. 그때, 눈송이 하나가 속눈썹 위에 앉았는지 진이가 눈을 꿈틀거리며 고운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여학생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쥐며 창가에 더욱더 달라붙었다. 그 옆에서 걸어가던 지혁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를 보다가 여학생들의 시선들을 눈치 채곤 생긋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꺄악.”'여학생들의 얼굴이 붉어진 건 당연지사. 그 미소를 보기 위해 항상 아침잠을 마다하고 일찍 등교하는 그들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학교 건물 안으로 그 두 사람이 사라지자 드디어 창문가는 소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내가 들었는데 권지혁 선배한테 남동생 두 명이 있대. 중2이랑 초등학생 3학년.”'“진짜? 걔네들도 한 인물들 하겠다.”'“어? 이상하다. 나는 여동생 3명이 있다고 들었는데.”'“정말?”'“그나저나 선우진 선배는?”'“진이 선배는 3대독자라더라.”'“진짜?”'문득,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여학생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그런 거 보면 진이 선배랑 지혁 선배는 서로 엄청 다른 것 같은데도 친하단 말이지.”'“어라, 그러게.”'“맞아, 성격도 되게 다르잖아.”'모두들 그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마고우 권지혁과 선우진.’ '이 타이틀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이 교내에서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잘생기기만 했으랴, 두 명 모두 훤칠한 키에 사립은 아니지만 서울에서도 꽤나 명성 있는 이 학교 전교 1, 2등을 다투는 수재들이었다. 성격이 많이 달라서일까? 1, 2등을 다투는 경쟁자들이면 보통 사이가 안 좋은 게 당연한데 그들은 이상하게 사이가 좋았다. 권지혁은 상대방이 누구든지 성별, 나이 가리지 않고 미소를 아끼지 않는 싹싹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선우진은 크게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포커페이스였다. 물론 웃긴 했지만 그것은 예의 바른 미소로 제한되어 있었고 웬만해서 그의 감정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아서 소위 ‘냉미남’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뭐, 하지만 이런들 저런들 어떠리오. 여심을 흔들게 하는 이 잘생긴 남정네들이 같이 돌아다니니 그녀들에겐 눈요기도 그런 눈요기에 다시없을, 말 그대로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학생들의 선망인 그들에게도 고민이라는 것은 있었으니, 아니 정확히는 권씨 가문의 장남 지혁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하아, 미치겠다.”'교실에 들어온 후, 의자를 뒤로 밀치고 주저앉은 지혁은 책상 위로 쓰러지듯 널브러졌다. 말 그대로 고개를 처박고 있던 그가 한숨과 함께 교복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드는 사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진이는 말문을 열었다.'“아직도 빠듯해? 저번에 아르바이트비 받았다며.”'자신의 책상 위로 걸터앉는 진이를 살짝 충혈 된 눈으로 흘긋 바라본 지혁은 고개를 돌려 숫자들로 빼곡한 자신의 수첩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 식구가 몇인데 그 쥐꼬리만 한 걸로 되겠냐. 요번 전기세랑 우혁이 학원비에 보탰더니 봉투가 금세 비더라.” '“너도 참 고생이다. 그냥 우리 할아버지한테 부탁하면 될 일을.”'“말이 쉽지. 만난 지 얼마 안 된 분한테.”'그런 그가 답답한지 진이는 혀를 찼다.'“후견인이 그냥 있는 줄 아냐? 다른 후견인도 아니고 너희 부모님이 정해 주신 후견인이야, 우리 할아버지.”'“그래도…….”'죽마고우 진이가 알고 보니 자신과 동생들의 후견인인 선우 기업 회장의 손자란 걸 알게 된 건 불과 반년도 안 된 일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아니, 며칠 전 들은 진이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주 우연은 아니란다. 지금 진이와 자신처럼 할아버지와 죽마고우였던 진이네 할아버지는 옛날부터 지혁이네 가족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셨다고 했다. 특히나 3년 전 지혁과 그의 동생들이 부모님 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어찌어찌 듣고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도중, 마침내 2년 전 지혁이가 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걸 알아냈고 그를 찾기 위해 진이를 이 학교로 진학시킨 거였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진이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왔던 지혁은 중학교 졸업 때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하고 갑자기 자신이 가는 학교로 가게 되었다는 진이의 말에 신나했을 뿐 그가 찾는다던 사람이 자신이란 걸 꿈에도 알지 못했었다. 그건 진이도 마찬가지.'“참 꼬이고 꼬였단 말이지. 선우그룹의 소문난 호랑이 우리 할아버지가 너희 할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셨고, 너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소식이 끊겼었는데 3년 전 너희 부모님이 돌아가셨단 소문을 어찌하여 들으셨다가, 2년 전 널 찾기 위해 이 학교로 보내셨지만, 알고 보니 나와 6년 이래 친구였던 네가 그 권씨 가문의 장남이었다……그거지.”'신중하게 선우씨 가문과 권씨 가문의 역사를 읊는 진이를 보며 지혁은 그 모습이 웃겼는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심장을 앓는 걸 알 리 없는 그 둘은 곧이어 지혁의 수첩, 일명 가계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그럼 어떻게 할 거야? 너희 육남매 굶는 건 아니지? 너라면 몰라도 걔네들은 아직 성장기야.”'그렇다. 권지혁의 동생들은 둘도 셋도 심지어는 넷도 아닌 다섯이었다. 3남 3녀로 이루어진 요즘 보기 힘들다던 바로 그 육남매. 꽤 유복하게 살던 그들은 하늘 아래 날벼락처럼 3년 전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마땅한 친척들이 없어 덩그러니 몸만 남아 버렸다. 그때는 자기 자신도, 심지어는 부모님의 재산을 관리하던 변호사도 후견인이 있다는 걸 몰랐던지라 앞날 걱정만 하느라 바빴다. 전에 살던 집을 팔고 부모님이 남기신 재산을 모아 보니 작은 아파트로 옮기고도 그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버틸 정도는 되었기에 처음엔 아주 큰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갈수록 커가는 동생들로 인해 필요한 생활비는 지혁의 치밀한 경제관념에도 나날이 늘어났고, 부모님이 남겨 주신 재산을 아끼기 위해 결국 중학교 졸업 후 학생가장후원 제도가 있는 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다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보았지만 역시 고등학생의 힘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는 법. 게다가 장학생으로 이 학교를 다니는 거라서 학교 공부를 놓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반년 전 진이의 집에 우연히 갔다가 그의 할아버지가 자신 가족의 후견인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도움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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