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토요일. 무연은 오늘따라 화려하게 치장한 하나가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재현도 옆자리에서 업무를 마감하고 있는 듯했다. 회사는 대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경영 전략실과 같이 특별한 업무 때문에 출근한 사람들도 대부분 퇴근을 한 상태였다.

“재현 씨!”

하나가 살그머니 부르자 재현이 무심한 눈을 들었다. 그러자 하나가 의미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보며 씩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나가 사라지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재현이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어디 가느냐고, 묻고 싶었다. 같이 가자고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무연은 그러지 못했다. 정말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무연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나 희망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심장이 미친 듯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무연이 버려야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 그녀는 매 순간 그와의 이별을 염두에 두고 그를 만나 왔었다. 그랬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은 결국 이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연은 그와의 이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심장이 미친 듯 불안하게 뛰고 숨이 턱하니 막혀 옴을 느꼈다.

황재현과 이별이라니! 그 순간, 무연은 그가 자신에게 이미 너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를 잃으면 숨이 끊긴 듯 아플 거라고 심장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안 돼! 놓칠 수 없어!’

첫 번의 이별이 불가항력적이었다면 이번은 다르다. 무연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을 놓칠 수도, 잡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연은 그를 잡아야 했다. 그는 아직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무연은 무작정 사무실을 나와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벌써 주차장으로 내려가 버린 것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하나를 만나러 가 버린다면, 그래서 그를 놓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사리물었다.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면 그를 쫓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비지땀을 흘리며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을 지하 3층으로 겨우 내려서자 다리가 후들거려 왔다. 모르긴 몰라도 사람이 별로 출근하지 않는 한적한 토요일이라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에 도착하고도 한참이나 지났을 것이다. 주차장에는 차가 드문드문 얼마 주차되지 않았기에 황재현의 차를 찾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변을 바쁘게 둘러보던 무연은 그의 것으로 보이는 차가 막 출구를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무연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외쳤다.

“황재현!”

한적한 주차장이 그녀의 목소리로 왕왕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끼기긱……. 바퀴가 길게 울며 그녀의 목소리를 삼켰다.

“황재현!”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이미 사정거리를 벗어난 그의 차를 향해 다시 한 번 힘껏 소리쳐 보았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녀에게서 도망이라도 치듯 빠르게 달리는 차를 뒤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다리는 지칠 대로 지쳤고 구두 뒤축에 발뒤꿈치가 다 까져 피까지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보다 차의 뒷모습이 꼭 차갑게 등을 돌린 그의 마음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쫓을 수가 없었다. 심장 한 뭉텅이가 설컹 베어 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아릿하다. 애써 버텨 왔던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비척비척 가까운 벽에 몸을 기대서자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바보, 멍청이! 역시 강무연은 그런 과분한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모양이다. 그에게는 평범하고 좋은 가정에서 자라 고운 성정을 가진, 자신감 넘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어울린다. 꼭 이하나 대리처럼. 그를 화나게 했지만 오히려 그를 위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어린 시절 엄마가 마지막으로 사 주셨던 아끼고 아끼던 사탕을 동네 아이에게 빼앗겼던 때처럼 슬프고 서러웠다. 결국 강무연이라는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될 달콤함이라는 듯 그렇게 체념하고자 하지만 울컥울컥 토해지는 울음이, 그러나 자신의 생각은 마음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전부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마음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런 마음이 죄스러워 또다시 죄책감에 빠지고 만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빛처럼 아름다운 남자, 황재현. 그를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은 마치 죄를 짓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이제 그를 놓아야 할 때가 온 모양이다. 몇 개월간 나름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래도 마음을 온전히 주지 않았을 때 끝을 낸 것이 다행이다. 무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참 우습다. 마음 정리를 이토록 금방 끝내다니. 한 번의 경험이 있다 보니 포기도 빠른 것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설움은 더욱 짙어져만 간다.

얼마를 그렇게 한구석에 쭈그려 있었을까? 주변이 무척이나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무연은 풀린 다리를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현기증이 일어 벽을 짚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끝이라고. 한동안 참 행복한 꿈을 꾸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서 있는데 귓가에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혹여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키게 될까 봐 무연은 손으로 얼른 얼굴을 훔쳐 눈물 자국을 없애고 몸을 바로 세웠다. 이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때였다.

“강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