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은 꿈을 꾸었다.'20년도 더 지났을, 이젠 너무 희미해져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과거의 어느 날이었다. 꿈속엔 술에 찌든 얼굴을 숨기려 짙은 화장을 한 엄마가 아닌 어릴 때 본 청순하고 맑은 얼굴의 엄마가 있었고, 기억이 나진 않지만 자신과 꼭 닮은 아빠가 있었다. 그리고 예쁜 동생도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가족이었다.'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앙증맞은 리본을 머리에 단 채린은 아빠의 손을 잡고, 동생은 엄마의 품에 안긴 채 공원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호수가 보이는 나무 아래에 커다란 돗자리를 펼치고 그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엄마가 싼 맛있는 김밥을 먹고, 아빠가 주는 음료수를 마시며 채린은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호수에서 이상한 괴물이 튀어나와 채린을 안고 있던 아빠를 데리고 가 버렸고, 채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동생을 안고 있던 엄마도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괴물이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 이번엔 채린에게 다가왔다. '“아악!”'꿈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헉!”'숨을 몰아쉬며 채린은 눈을 떴다. 보이는 거라곤 사방이 온통 파란색뿐이었다. 그 순간 채린은 자신도 괴물에게 잡혀 호수 안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이번에는 소리가 제대로 나왔다. 넓은 침실에 채린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 때쯤 채린은 너무나 생생한 느낌에 머리를 감싼 손을 내리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그리고 자신이 누워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주위를 둘러보기도 전에 채린의 눈에 사람의 형상이 들어왔다.'“헉…….”'꿈인가 보다……. 채린은 아직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사람이 눈앞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꿈이 아니고서야 저 사람이 저렇게나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올 리 없지 않은가.'“흑…….”'별안간 눈물이 차올라 채린은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괜찮은 거야?”'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채린은 놀란 얼굴을 들었다. 너무 놀라서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꿈이 아니었다. 파란색으로 가득 차 있는 사방은 물속도 아니었고 눈앞에 있는 남자도 정말 현준이었다.'“악몽이라도 꾼 모양이군.”'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는 현준을 보니 지금이 현실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헉!”'어느새 다가온 현준이 채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땀이 흘러 끈적거리는 이마에 손을 올린 채 현준이 채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열도 있군. 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여전히 아니, 조금 전보다 더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던 현준이 손을 이마에 그대로 둔 채 침대에 앉았다. 현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남성적인 향에 채린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리고 현준의 손이 놓여 있는 이마에는 채린도 느껴질 만큼 열이 나고 있었다. 채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자 현준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하지만 채린에게서 손을 뗄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의 손이 가는 목으로 내려가 그녀의 목덜미를 살며시 잡았다.'“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말랐잖아. 그러니 쓸데없는 악몽을 꾸지. 예전보다 더 심한 거 같은데…….”'현준의 곁에서 잠을 잘 때도 가끔 이런 일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저 신음 소리만 몇 번 냈을 뿐이지, 오늘처럼 이렇게 비명을 지르면서 깨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현준은 그때와 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무슨 꿈이기에 소리까지 질러?”'마치 그 꿈을 말해 주면 다시는 꾸지 않게 해 주겠다는 얼굴이었다.'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붙어 버렸는지 채린은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멋대로 날 여기로 오게 만든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내가 이 빌라에 이사를 오게 된 건지, 왜 당신이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지, 묻고 따져야 하는데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당장에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손부터 치우라고 해야 했다. 그렇지만 채린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현준에게 가장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기 때문이었다.'“민채린…….”'“기사…….”'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고, 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말해.”'언제나 자신의 할 말이 먼저였던 사람이 채린이 먼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채린은 빠져 버린 기운을 차려 현준에게 물었다.'“기사…… 봤어요?”'채린이 어제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서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은 혹시나 이 사람이 이것 때문에 난처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채린의 물음에 현준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보았을 것이다. 채린으로서는 두 사람이 함께한 지난 5년간의 사랑이 사람들의 입에 스캔들로 오르내리는 게 괴롭고 힘들었지만, 현준은 자신과는 다른 이유로 그 기사를 불쾌하게 보았을 것이다. 놀랐던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가자, 문득 현준이 언제 어느 순간에 기자들에게 노출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미…… 미안해요. 그런 기사 나오게 해서…….”'채린과 관계가 있다는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없었지만 채린은 두 사람의 얘기가 나온 것만으로도 현준에게 미안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랬건 간에 자신이 배우이기에 세상에 알려진 것일 테니까. 그 일로 현준이 화를 내고 자신에게 뭐라고 하더라도 채린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 말하는 그녀의 말투에서 현준은 채린이 오늘의 기사는 보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누가 한 일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미안하다고 하는 채린이 안쓰럽긴 했지만, 현준은 그것보다 채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생소하기까지 한 존댓말이 귀에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