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문을 열어 준 방으로 들어선 채린은 넓은 거실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고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 문을 열기 전 비서라는 남자가 분명 노크를 했고 문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무언가를 계속 보고 있었다. 셔츠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리고 노트북과 서류를 번갈아 보며 메모를 하고 있는 남자는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이사님, 민채린 씨 오셨습니다.”'비서의 보고에도 남자는 마찬가지였다. 민채린이라는 여자가 이곳에 오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는 듯 계속해서 메모를 하더니 한 손을 들어 그만 나가라는 식으로 손짓을 했다. 그에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한 후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졸지에 환영받지 못한 불청객이 되어 버린 채린은 혼자 멀뚱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속으로는 지금 나간 남자를 따라 자기도 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룸 밖으로, 아니 아예 이 호텔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애써 참고 있었다. 방 안에선 남자가 넘기는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채린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이 남자가 나를 부른 거라고 들었는데 아닌 건가?’ '이름도 생소한 무슨 명품 론칭 행사장에서 채린이 전해 받은 명함의 주인은 서현준이라는 남자였고,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 명함의 주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서한 그룹의 이사란 얘기였다. '이제 막 신인 배우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채린에게 그 명함은 그전에 받았던 몇 장의 명함과 같은, 하룻밤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 명함을 받았을 땐 대체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건지 몰라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랬더니 명함을 건네준 남자가 귓속말로 호텔의 방 번호를 말해 주었다. 명함의 주인이 몹시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채린은 이 명함이 자기와의 하룻밤을 사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건네받은 명함들을 그 자리에서 버리지도 못하고 클러치 백 안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서현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그 명함 역시 더 자세히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조그만 백 안에 넣어 버렸다. ''“어머, 웬일이야. 서 이사가 이런 델 다 오고? 아까는 안 보이더니 언제 온 거야?”'“누구? 서한 그룹 서현준 이사? 어머 정말이네? 참, 그러고 보니 여기 서한 그룹 산하 호텔이잖아? 그래도 그렇지, 서 이사가 이런 사소한 행사에 웬일이지?”'흔하디흔한 론칭 행사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상당했다. 스타라는 이름표를 가지고 있는 연예인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사실 작은 행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 행사가 대단하다고 해도 서한 그룹의 이사가, 그것도 현재 가장 잘나가는 그룹의 실세인 서현준 이사가 참석하기엔 너무도 작은 행사였다.'“무슨 일로 왔든 오늘도 역시 멋진데. 벌써 여자들 달려드는 것 좀 봐라. 쟤 이번에 해외 무슨 영화제에서 상 받은 장하연 아니야? 서 이사 옆에서 떨어지질 않네. 저래 봤자 다 헛물이라는 거 모르는 모양이지?”'“헛물이라니, 왜? 서 이사 뭐 소문 있어?”'“글쎄, 말 그대로 소문이라서…….”'“뭐야, 무슨 소문이야?”'“나도 얼마 전에 들었는데 서 이사 서한 그룹 일원이라고 하더라고.”'“정말? 일원이라면 박 회장님이 밖에서 낳은 자식?”'“미쳤어? 그 회장님 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그 양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밖에서 자식 보는 거라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그럼? 손자라도 된대?”'“그거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나이에 서한 그룹 이사라는 게 설명이 안 되지.”'“저 인물에 저 능력에 출생까지 그렇다면 서 이사 너무 완벽한 거 아니야? 호호호.”'잠깐 한눈판 사이 매니저인 민기와 떨어져 여기저기 눈을 돌리며 그를 찾는 중에 채린은 여자들의 수다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서한 그룹의 서현준 이사라고?’'여자들의 수다 속에 등장한 남자의 이름이 귀에 익은 이름이어서 채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어디서 들었지? 아, 명함!”'조금 전 자신이 건네받은 명함의 주인이 바로 서현준이었다. 순간 채린은 호기심이 동했다. 자신에게 명함을 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여자들의 수다만큼 그가 멋있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수다 중인 여자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남자는 이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몇 번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애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몇 번 고개를 내밀고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문득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우스워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훗, 무슨 상관이람. 저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차피 볼 사람도 아니잖아.’'그러나 30분 후 채린은 자기에게 명함을 건네준 남자의 뒤를 따라 이 호텔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룸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금 전 서현준이라는 남자에 대한 관심을 끊고 등을 돌리려는 순간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남자의 눈은 정확하게 채린을 향해 있었다. 그 눈은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채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흠칫하는 걸 느꼈다. 순간적으로 몸이 딱딱할 정도로 긴장이 되며 몸에 찌르르 전기가 흘렀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몇 달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났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사람들도 희미해졌고, 모든 게 하얗게 변해 갈 때쯤 감독의 큐 소리가 들렸다. 채린은 첫 연기를 그 상태에서 시작했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온몸이 짜릿할 정도의 흥분이 그날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흥분되고 짜릿했다. 완벽한 냉방 덕에 몸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인데도 몸 안에는 뜨거운 열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자들의 수다도, 지나가는 웨이터가 음료수를 권하는 소리도 채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서너 명의 여자들 틈에서 얼굴만 겨우 보이는 남자는 배우 혹은 모델이라고 해도 금방 수긍이 갈 만큼 잘생긴 외모였다. 하지만 결코 서한 그룹이라는, 이 나라 국민이면 어린아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 본 거대 그룹의 이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전 여자들의 수다에 등장한 서한 그룹의 서현준 이사가 확실했다. '그때 채린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자신의 백 안에 들어 있는 명함을 저 남자가 준 게 확실할까 하는 물음이었다. 남자는 이런 자리에서 명함이나 주며 하룻밤 여자를 사는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본 게 틀리지 않는다면 남자는 이 자리를 몹시나 지루해하고 있었다. 채린은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대 스타인 장하연이 남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채린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너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 남자의 눈빛에 채린은 당신 역시 별것 아니라는 듯 싸늘한 미소를 날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