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애담 2권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매우 번극했다. 거기다 큰 나라를 섬기는 작은 나라이다 보니 글자 하나로도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라는 예전부터 외교문서를 다루는 인재를 기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승문원의 제조로 임명하고 문과급제자 중에서도 젊고 명석한 이들만 골라 승문원에 배정했다. 그만큼 기대가 큰 곳이기에 습득해야 할 교육의 양도 무시무시한 곳이 바로 승문원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문제술은 승문원의 관리로서의 자질을 시험하고 요직으로의 승진을 보장하는 것이기에 그에 대한 교육은 철저했다. 거의 날마다 수업이 진행되었고 달마다 3차례 이문제술 시험을 보아 그 성적을 기록해 임용의 근거로 삼았다. 그뿐 아니라 임금과 세자가 직접 시험을 주관하기도 하기 때문에 승문원에 적을 두고 있는 자들은 밤을 낮처럼 밝혀 이문습득에 매진해야 했다. 덕분에 엉덩이에 괭이가 박히는 것은 물론이고 코피가 줄줄 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상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초도가 끝이 나질 않아 숙직은 여전했고 그 무수한 밤들을 교재와 씨름해야 했다. 본디 워낙 중심이 확고한 사람이라 곱지 않은 시선에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묵묵히 잡일과 공부에 매진하던 그였다. 그러나 교재를 펼쳐 놓고 앉은 오늘의 그는 다른 날과는 사뭇 달랐다. 열심히 소리 내어 교재를 읽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상현의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였다. 그의 온 정신이 하나의 물음에 뻗쳐 있었기 때문이다.'‘왜 일까?’'그의 밑도 끝도 없는 의문은 금세 걱정이라는 놈을 파생시켰다.'‘내가 잘못한 것일까?’'상현의 의문과 걱정의 근본은 바로 태희였다. 꽃잠을 자고 스무 날 남짓 지났다. 아직 풀리지 않은 초도와 계속되는 시험 때문에 그녀와 한 베개를 베고 누운 것은 딱 두 밤이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때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열정적으로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품고 소유하고 소유 당하고 싶은 본능에 충실했다. 태양보다 더 뜨겁고 햇솜보다 더 부드러운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은 경험할 때마다 그를 전율케 했다. 뒤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샌 줄 모른다고 한 밤에 두세 번을 태희 안에서 허물어지기도 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었고 만족감이었다. 상현은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태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툰 애무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다정하게 저를 품어 주었다. 하지만 허겁지겁 꽃 살을 파고들면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이물감과 통증에 고운 이마가 휘었다. 상현을 들뜨게 만들던 진솔한 기쁨의 노래도 그때면 뚝 끊어져버렸다.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아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저처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희열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했다.'‘뭔지 몰라도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해. 이를 어쩐다?’'걱정이 태산 같이 밀려들었지만 지극히 비밀스러운 부부간의 일을 누구에게 털어 놓는 단 말인가? 상현의 얼굴이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그때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량하!’'천하의 한량이요 제 집보다 기생집에서 사는 날이 더 많은 친구를 두고 고민을 호소할 사람을 찾았다니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상현은 탁 하고 무릎을 치고 싶어졌다. 열다섯에 장가를 들었고 그 후로도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린 인명이니 이보다 마땅한 상담자는 없을 터였다.'‘퇴궐하는 대로 그 친구를 찾아가야겠군. 량하라면 내가 모르는 그 뭔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줄 것이야.’'걱정을 떨쳐버린 상현의 낯빛이 환해지는 그때 교감(校勘: 종 4품의 승문원 관리)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문교육을 담당하는 교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리.”'교검을 따라 한참 이문 습득에 열을 올리던 나머지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현도 얼른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숙이자 교검이 공부에 전진하고 있는 이들에게 치하했다.'“수고들이 많네.”'“아니 옵니다, 나리.”'“안 해 봤으면 모를 터나 나도 거쳐 온 길이기에 자네들의 노고가 얼마나 할 지 알고 있네. 허나 주상전하께서 우리 괴원을 특별히 눈 여겨 보시고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정진, 또 정진해야 할 것이야.”'“예, 나리.”'“그래, 그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공부를 마저 하게.”'“예.”'교감의 지시에 상현을 비롯한 이문 교육생들은 자리에 앉아 다시 교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감은 교검을 밖으로 불러냈다.'“나 좀 잠시 보세.”'영문을 알 수 없으나 윗사람의 명을 거스를 수 없는지라 교검은 교감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교감은 관복 소매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교검에게 보여주었다.'“이게 무엇인지 알겠는가?”'교검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쳐다보았다. 상(上)자와 하(下)자를 아래위로 겹쳐 놓은 것 같은 글자는 난생 처음 보는 해괴한 모양이었다. 교검은 교감에게 물었다.'“이것이 무엇이옵니까?”'“모르는가?”'“송구하옵니다.”'“허어! 이런 낭패가 있나!”'교감이 찌푸린 얼굴로 탄식을 토해내자 심상치 않는 일임을 짐작한 교검이 이유를 귀띔해 달라 청했다.'“무슨 일이옵니까? 대체 무슨 일이시관데 이리 곤욕스러워 하십니까?”'교검의 묻는 말에 교감이 이유를 밝혔다.'“며칠 전 주상전하께서 문서고에 명하시어 예전에 청에서 온 칙서를 가져오라 하셨지 않나? 그것을 읽으시다가 卡脖子라는 글을 보시고 마침 자리에 계시던 예조판서 대감께 이것이 무슨 글자냐 물으셨는데 대감께서 대답을 하지 못하시어 곤욕을 치르셨다고 하네. 주상전하께서는 그대도 모르는 글자가 있었냐며 웃어 넘기셨지만 당사자는 어디 그런가? 즉시 판교 영감께 의뢰를 했는데 판교 영감께서도 모르는 글자이신 거야. 그래서 내게 자네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명하셨는데 이를 어쩐다? 어허!”'교감이 난색을 표하자 차분한 성격의 교검이 질문을 던졌다.'“칙서의 내용이 어떠했습니까? 이 글자가 들어 있는 부분 말입니다.”'“왜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네. 강력하게 내리눌러야 한다는 뜻이었지 아마?”'“내리누르다, 내리누르다.”'교검이 유일한 단서를 되뇌는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주상전하 납시오!”'“이런!”'교감과 교검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수행원들을 거느린 임금이 모습을 나타냈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으나 수렴청정 없이 바로 정사를 돌볼 만큼 군주의 기질을 타고 난 무소불휘의 임금은 울림 좋은 목소리를 냈다.'“뭘 그리 놀라는가? 과인의 흉이라도 보았는가?”'교감과 교검이 기함을 했다.'“전하!”'하얗게 질린 두 사람이 털썩 자리로 주저앉아 고개를 조아리며 바들바들 떨자 임금의 잘생긴 입술이 슬쩍 들려올라갔다.'“재미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농이니 어서 일어나라.”'임금의 명에 개구리처럼 답삭 엎드려 있던 교감과 교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임금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교감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발견하고 물었다.'“그게 무엇인가?”'“앗!”'화들짝 놀란 교감은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감췄다. 그리고 더듬더듬 변명을 내밀었다.'“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전하.”'임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아무것도 아닌데 어찌 양상군자의 행태를 하는가?”'순간의 실수로 임금의 매서운 눈길을 받게 된 교감이 기함했다.'“전하!”'“뺏을까?”'제 딴에는 예조 판서와 판교의 체면을 보아 한 행동이나 그렇다고 해서 엄한 덤터기를 쓸 수 없는 교감은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상선이 냉큼 달려와 그것을 받아들어 임금께 올렸다. 꾸깃꾸깃 구겨진 종이를 본 임금의 눈썹이 휘었다. 종이에 써진 글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의 처리 문제를 두고 큰 나라로 섬기고 있는 명의 견해를 알아보고자 칙서를 살피던 중 예조 판서에게 물었다가 답을 듣지 못한 바로 그 글자였다.'“그대가 어찌 이 글자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는 교감은 자신이 그 글자를 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임금에게 고했다.'“판교께서 글자의 뜻을 알아보시라 하였는데 소신은 알지 못하는 지라 저보다 조예가 깊은 교검에게 묻는 중이었사옵니다.”'“판교?”'“예조 판서께서 판교께 도움을 청하셨다 들었습니다.”'교감의 설명에 사건의 정황을 짐작한 임금의 딱딱한 얼굴이 풀리기 시작했다.'“알아냈는가?”'“그것이 아직…….”'“그래?”'“황공하옵니다, 전하.”'교감과 교검은 쌍둥이처럼 머리를 조아렸고 임금은 나른하게 말했다.'“다른 나라와 주고받는 모든 문서를 관장하는 괴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판교와 교감 그리고 교검도 알 수 없는 글이라.”'“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온 문서고를 다 뒤져서라도 알아내겠사옵니다.”'“습독관들은 어떠한가?”'“예?”'임금의 뜬금없는 말에 교감은 감히 되묻는 불충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곳에 관심이 가 있는 임금은 그것을 개의치 않고 글 읽는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는 강의실로 시선을 두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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