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당은 이슬에 젖은 풀잎들을 헤치고 거북봉에 올랐다. 자리를 잡고 허리를 쭉 편 그는 발아래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아침 안개에 쌓인 너른 논과 밭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푸르고 힘찬 젖줄기인 한강을 품고 있어 그 비옥함이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여인의 자궁과도 같았다. 드넓은 대지를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던 운당은 등을 돌려 뒤따라오는 작은 발걸음을 재촉했다.'“태희야, 어이 오너라. 어이!”'운당이 입을 귀에 걸고 손까지 저어 부르는 이는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5살 난 손녀였다. 입전(立廛: 육의전 중 비단을 취급하는 곳)상인으로 중국에서 조선으로 비단을 들여오고 조선에서는 면포를 중국으로 수출해 거부가 된 운당은 두 번의 흉년에 가진 것을 아낌없이 풀어 양민을 구제한 공으로 양인에서 곽산 부사(龜城府使)에 봉직되는 큰 광영을 누렸다. 그렇게 재산과 명예 등등 모든 복을 가진 그였지만 단 하나. 자식 복이 없었다. 본디 병약하던 일점혈육 아들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떴고 며느리 또한 한 해에 돌았던 돌림병에 강보에 싸인 딸을 두고 남편을 따라갔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혈육은 태희라 불리는 손녀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손에 쥐면 터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하며 애지중지 한 손녀는 밤톨을 깎아 놓은 것처럼 어여뻤다. 둥근 이마와 우뚝한 코에 산을 오르느라 붉어진 뺨과 오밀조밀한 입술까지 영락없이 살아 움직이는 작은 인형이었다. 태희의 유모인 청산 댁은 운당 앞에 태희를 데려다 놓았다. 그러자 운당은 조선의 돈을 죄다 움켜쥐는 큰 손으로 단풍잎 같은 태희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세운 다음 끝을 알 수 없도록 펼쳐진 땅 끝을 가리켰다.'“봐라. 저 끝까지가 모두 태희 네 땅이니라.”'태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탄성을 내질렀다.'“우와!”'손녀의 탄성에 기분이 좋아진 운당은 이번에는 폭을 쟀다.'“저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고 모두 네 땅이다. 어때? 많지?”'“예!”'“허허허!”'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에게 호탕한 웃음을 웃어 보인 운당이 조막만 한 손을 꼭 잡은 채 물었다.'“태희야, 땅에서는 무엇이 나더냐?”'“벼가 나옵니다.”'“그래. 그럼 그 벼로는 무엇을 하느냐?”'“밥을 먹지요?”'손녀의 앙증맞은 대답에 운당은 욕심을 냈다.'“밥만 먹더냐?”'“아니요. 팔아서 때때옷도 사고 꼬까신도 사지요. 엿도 사먹고요.”'“옳다. 그럼 너만 때때옷을 사 입고 꼬까신을 사 신을 것이냐?”'할아버지의 질문에 태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청산 댁도 사줘야 하고 김 서방도 사줘야 합니다.”'“어찌 주라 했누?”'“배 부르고 등 따숩게 주라 하셨습니다.”'“그렇지. 그런데 청산 댁하고 김 서방만 돌보라 하였느냐?”'“아니요. 근동에 사는 배 곪는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도 돌보라 하셨습니다. 과부와 고아도 함께요.”'총명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신이 입버릇처럼 되뇌던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하는 손녀에게 바락 욕심이 난 운당은 한층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그러려면 뭐가 있어야 하겠느냐?”'“돈이 있어야 합니다.”'“그럼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할고?”'“할아버지처럼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지요? 그리고 소작미도 받습니다.”'태희의 또랑또랑한 대답에 운당은 아직 일러주지 않았던 말을 물었다.'“그것들을 어떻게 불려야 하지?”'운당의 교육으로 소꿉놀이나 하는 보통의 여자 아이들과는 달리 돈에 대해서도 또 그것을 버는 방법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태희였지만 할아버지의 이번 질문은 참으로 어려웠다. '“으음!”'답을 알 수 없는 작은 고개가 갸웃거리자 운당은 인자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뒤 답을 알려 주었다. 그는 무릎을 구부려 흙 한 줌을 쥔 후 태희에게 말했다.'“손을 펴 보거라.”'손에 흙을 묻히는 것은 싫었으나 할아버지의 명이기에 거역할 수 없는 태희는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고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운당은 그 손바닥에 흙을 쏟아 붓더니 일렀다.'“꽉 쥐어 보거라.”'태희는 할아버지의 지시대로 손을 꼭 쥐었다. 운당은 그에 만족치 않고 그녀를 더 채근했다.'“더, 더!”'태희는 안간힘을 다해 손을 쥐자 운당의 다음 지시가 떨어졌다.'“펴 보거라.”'태희가 손을 스르륵 펼치자 운당이 말했다.'“지금 네 손바닥 안에 남은 양을 기억 하거라.”'“예.”'운당은 다시 한 번 흙을 한 줌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태희의 손에 쏟았다. 그리고 좀 전과는 사뭇 다른 요구를 했다.'“힘을 주지 말고 그대로 쥐었다 펴 보거라.”'태희는 할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펴자 손바닥 한가운데 흙이 남아 있었다. 운당이 물었다.'“어느 쪽이 흙이 더 많이 남아 있느냐? 꽉 쥐었을 때더냐, 가볍게 쥐었을 때더냐?”'“가볍게 쥐었을 때가 더 많이 남았습니다.”'“그래, 옳다. 태희야.”'태희는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온 세상을 고루고루 비쳐주는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할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운당이 흙으로 고운 손을 더럽히게 한 이유를 설명했다.'“돈은 바로 네 손안에 든 흙과 같으니라. 꽉 쥐는 쪽보다는 가볍게 쥐는 쪽이 더 흙을 많이 남기는 이치처럼 네가 홀로 잘 살려고 아등바등 손에 쥐고 놓지 않으면 조금 밖에 가지지 못할 것이고 가볍게 쥐어 절로 흘러나가는 것으로 집 안의 가솔을 또 어려운 사람들을 먹이면 많은 것을 쥐게 될 것이다.”'태희는 손바닥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말하는 바를 곧 깨우쳤다. '“알겠습니다. 소녀, 절대 꽉 쥐지 않겠습니다.”'“그래. 기특하구나. 이 할애비 네가 이 할애비의 말을 잊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명심하겠습니다!”'낭랑한 태희의 대답에 운당은 두루마기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흙으로 더러워진 태희의 손을 깨끗이 닦았다. 그런 후 필시 자신을 가뿐하게 뛰어넘을 태희의 원대한 미래를 점쳐보기로 했다.'“자, 그럼 이제 우리 태희의 포부가 얼마나 한지 한 번 볼까? 할애비가 줄 땅은 저 끝까지니라. 그에 만족하겠느냐?”'“아니요!”'댕기가 휘날리도록 고개를 가로 저은 태희는 손가락을 들고는 선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았다. 그리고 말했다.'“저는 이 사방 안에 들어간 땅을 모두 가질 것입니다. 또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실 금고에 자물쇠를 걸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모을 것이어요. 이만큼이요.”'영민하다 하나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태희가 두 팔을 한껏 벌려 보이자 운당이 짐짓 놀라는 척 눈을 크게 열며 물었다.'“오호! 자신 있느냐?”'“할아버지께서 그것들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일러 주셨는데 그도 못할까요? 자신 있습니다!”'태희의 맹랑한 대답에 운당은 뿌듯해지는 가슴을 감추지 못하고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운당은 어린 손녀의 둥근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당찬 꿈이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했다.'“너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할애비가 장담하마.”'태희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예. 소녀는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것입니다.”'“그래, 그래. 그럼 어디 우리 태희 땅을 다시 한 번 볼까?”'“예.”'“자!”'운당이 팔을 쭉 뻗어 손가락 하나를 펴자 태희도 곧장 할아버지를 따라했다. 그러자 운당이 외쳤다.'“가자!”'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하듯 똑같은 모습으로 선 자리를 한 바퀴 빙 돌아섰다.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 온 운당은 대견하기 그지없는 손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그리고 태희는 큰 웃음을 짓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예쁜 입술을 벌려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