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족하지도 풍요롭지도 않은 가정환경. 1남 2녀 중 장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꾸미면 예쁘고 아니면 모자란 외모. 그렇게 유명하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4년제 대학.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취미나 특기.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하는 영어 공부와 알바만으로 이루어진 생활 패턴. 사람들은 내게 말하곤 했다. '“넌 참 평범해서 좋겠다.”라고.'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나의 평범한 삶을 결코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범하다는 것은 곧 건조하다는 것이었다. 나의 삶은 늘 무미건조했고 재미가 없었다. '단 한 번,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의 시절을 제외하고. '그 시절. 나에게 유일한 어린 시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시절. 그 시절에 나의 외면은 물론 지금과 다름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내면은 아니었다. 나의 내면에는 한 차례, 아주 길고도 조용한 태풍이 지나갔다. 나조차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조용했던 그 태풍은 지나치고 나서야 큰 후유증을 남기며 나를 조롱했다. 나는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잃은 만큼 정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때의 태풍을 단 한순간도 잊지 못했다. '그 아이가,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내 곁을 머물렀던 그 순간들.'그 소중한 순간들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우리 반에 남자애 하나가 전학을 왔다. 그때 우리들은 누구나 전학생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전학생은 적어도 전학을 오는 당일은 주인공이었다. 모두가 전학생의 얼굴과 말투, 행동거지 등 그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다. 마치 당대의 톱스타처럼, 전학생의 1분 1초는 주위의 수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감시를 당한다. '그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가 전학을 오던 그날의 기억은, 대부분 뿌연 안개처럼 흐리멍덩하고 애매한데 반해 딱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그것이었다. 남색 모자. 그는 남색 캡 모자를 쓰고 있었고 삐쩍 마른 몸에 키가 꽤 컸다. 그리고 나름대로 수줍음을 타는 듯 조용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뭐라고 말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한 가지,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다들 그에게 관심을 갖는데, 나는 초반에 잠깐 호기심이 들었을 뿐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우리 반과 우리 학교, 그리고 우리 동네를 탐색하듯이 조용히 적응해갔다. 그러다 점점 슬그머니 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전학 올 때 했던 말과 마찬가지로 그는 정말 축구를 잘했던 것이다. 그 나이 때에 축구는, 또래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권력과 같은 것이었다. '첫 시합에서 혼자 두 골이나 넣어서 반 대항전을 이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참 쉽고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아이들은 점점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는 딱히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고 재치가 넘치지도, 공부를 잘 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과묵한 편이었고 그런 와중에 장난기도 있어서 여자아이들에게 툭툭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이상하게 그와 짝을 세 번이나 하게 된 다음부터였다. 한 학기에 한 번도 하기 힘든 짝을, 그와 세 번이나 한 것이었다. 모두 다 제비뽑기였다. 두 번까진 그러려니 하더니 세 번째가 되자 아이들은 우리더러 운명이라고 했다. 세 번이나 짝을 했으니 당연히 그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는 다른 여자애들보다 유독 내게 더 장난을 많이 쳤다. 지나가다가 머리를 쭉 잡아당겨 풀어지게 하기도 하고, 키가 작다고 놀리기도 하고, 청소를 하고 있으면 자기 쓰레기를 온통 내 쪽으로 주면서 방해를 했다. 나는 그걸 부럽다고 하는 여자아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장난이 귀찮았고 짜증났다. 그는 히스테릭한 내 반응에 더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5학년 말쯤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이번엔 좀 특별하게 자리를 바꾸고 싶다며 남자애들을 모두 뒤 쪽으로 세웠다. 여자애들은 모두 옆자리를 비운 채 앉아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카운터를 셀 테니 땡! 하는 순간 남자애들 보고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10. 9. 8. 7. 6. 5. 4. 3. 2. 1 …… 땡!'땡, 소리가 났는데 남학생들은 뒤에서 모두 눈치만 보고 발을 멈칫하더니 쉽게 움직일 줄을 몰랐다. 여기서 후다닥 달려가서 자리에 앉으면, 원하는 짝과는 앉을 수 있겠지만 자신이 누굴 좋아하는지 공개적으로 밝히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반에서는 효인이가 제일 인기가 많았는데, 네 명이나 동시에 효인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한 남자애가 용기내서 제일 첫 번째로 효인이 옆에 가 앉았다. 그러자 남자애들이 에라 모르겠다 움직이기 시작했고 자리는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자리가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반에서는 우우 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리들은 점점 채워지는데 내 옆자리만 꿋꿋이 그대로인 것이 느껴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는 것도 민망했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나는 효인이처럼 얼굴이 하얗지도, 예쁘지도 않았다. 쌍꺼풀 없는 눈에 피부도 썩 좋지 않았고, 앞머리 없이 질끈 넘겨 묶은 머리는 푸석푸석했다. 한마디로 나는 평범한 것보단 약간 찌질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 순간, 옆자리에 그림자 하나가 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와 하는 소리도 덩달아 들렸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보았다. 낯익은 남자아이의 뒤태가 보였다. 임승현이었다. 그가 등을 보이고 옆으로 돌아 앉아 있었다. '남은 자리는 나를 포함해서 8, 9개 정도였고, 그는 그때까지도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있다가 묵묵히 내 옆에 앉은 것이었다. 아이들의 관심이 쏠리자 민망했는지 그는 똑바로 앉더니 남색 모자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나는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승현이의 옆모습을 보는데 민망함 때문인지 창피함 때문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뻔했다. 그래, 그때부터였다. 우리 사이가 정말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