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한서 스물일곱, 정서연 스물''11시. '이미 하늘이 어두워진 지도 한참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돌아와야 할 작은 새는 방을 비워 두고 있다. 기다리는 새는 오지 않고, 덩그러니 어둠 속에서 이 방을 지키고 있는 건 나뿐이다. '기다리는 건 지겹지 않다. 기다린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내색할 수 없기에, 이렇게 홀로 기다리는 시간이 내겐 온전히 나만의 새를 품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니까. 다만 늦어지는 시간이 걱정될 뿐이다. 그리고 내 것인 새를 자신의 손에서 길들이기 위해 애쓸 한 녀석이 거슬릴 뿐. '방 안의 향취에 은근 숨이 막힌다. 그 녀석이 쓰는 화장품의 향인가 싶다가, 그런 내 마음에 고개를 젓는다. 이건 그 녀석의 체취이다. 아주 오래전, 화장품을 쓰기 전부터 나던 녀석의 체취.'어지럽다. 아찔하다. 다른 사람도 이 향취를 맡을 수 있을까? 미약한 공기의 흐름에 취해 버린다. 서서히, 은근히, 그윽하게.'내 방과 나란한 녀석의 방도 테라스가 작게나마 붙어 있었고, 테라스로 향하는 바깥쪽은 대형 창문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다. 순전히 어머니의 취향으로 지어진 집이지만 녀석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집이다. 녀석은 어머니와는 취향이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줄곧 어머니의 뜻대로 꾸미고 가꾸는 녀석이지만, 이 집만은 어머니와 의견이 같았다. '나는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연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정화가 될까 했던 내 생각은 뜻밖에도 어긋났다. 훈훈한 밤공기가 그윽하게 취해 있던 내 심장을 더욱 자극하며 달뜨게 만든다. '낭패다……. '정말이지 낭패다. 시간이 갈수록 절제를 모르는 내 심장 때문에, 나는 극심한 낭패감을 또 한 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둑처럼 위태위태한 심장의 울림이 짙어진다. '심호흡을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러다 우연히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녀석이 걸어올 길로.'“……!”'잘못 본 건 아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어두워 발밑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라고 해도, 내가 그 녀석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대문께의 장명등 아래였다. 순간 테라스 난간을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이현제, 오래된 나의 친구. 내겐 둘도 없는 친구다. 그러나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정서연, 그 녀석이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이현제!”'부드럽게 다가간 키스. 귓가를 스치듯 다가간, 소녀의 탈을 막 벗기 시작한 순결한 여자에게 어울리는 키스였다. '두두둑, 뚝. 뚝.'“네가 감히!”'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퍼진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피라는 것을 인지할 틈이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분노로 가득 차, 생각이라는 것이 마비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뛰쳐나가지 않은 건 한 가닥 남은 마지막 이성의 끈 때문이다. 완전히 놓지 않은, 솜털보다 가볍고 머리카락보다 끊기기 쉬운 마지막 이성의 끈.'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거뒀다. 진정이 되지 않는다. 입 안의 비릿한 맛이 조금 전보다 강해졌다. 그러나 내 심장은 평정을 되찾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진정은커녕 폭주라도 막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싶다. '찬물에 샤워라도 할까. 아님 얼음이라도 삼켜 볼까. 헤집어 도려내는 듯한 가슴의 통증을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다. 게워 내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은 이 감정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다.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내 머릿속과 심장은 누가 먼저 폭발하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친 듯 날뛰고 있었다. 내 이성은 그저 방관자처럼 지켜볼 뿐이다. '달칵. '“……오빠?”'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나의 작은 새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인다.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나만의 새. '오늘이 보름이었던가? 젠장! 달빛이 너무 강하다. 아무래도 달빛 탓인 듯하다. 달빛 탓이다. 저 하늘하늘한 원피스 안에 숨겨져 있을 녀석 본연의 모습이 내 눈앞에 고스란히 그려지는 건. '숨이 막힌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내뱉는 호흡은 뜨겁기 그지없다. '“나 기다린 거야, 오빠?”'“불 켜지 마.”'불을 켜기 위해 벽으로 뻗은 녀석의 손이 다급한 내 목소리에 멈칫한다. 순간 나는 내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목소리에 욕망이 잔뜩 묻어났던 것이다. 눈치 챘을까, 저 녀석? 내 욕망을 알아채 버렸을까?'“왜 그래, 오빠? 목소리가 안 좋아. 어디 안 좋은 거야? 열이라도 있는 거야?”'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마라, 제발……. '나는 다가오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녀석이 다가올수록 내 심장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점점 세차게 뛴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마라. 내 손이 미치는 곳까지 오지 마라. 내 손이 닿는 곳까지 와 버리면 넌, 산산이 깨어져 부서질 테니까. 10년을 내 손으로 지켜 온 너를 내 손으로 더럽히고 말 테니까. '부탁이다……. 오지 마라, 서연아. 주인도 없는 방에서 뭐하는 거냐고 화를 내며 나가라고 명령해라.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함부로 여동생 방에 들어오는 건 실례라며 날 가르쳐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법적으로도 아무 상관없는 허울뿐인 여동생이라 깔보는 거냐고 날 비난해라. 아…….'“얼굴이 뜨거워.”'녀석의 차가운 손이 내 뺨에 닿았다. 그에 이끌리듯 내 눈동자가 녀석의 검고 다정한 눈 위에 내려앉는다. 그러자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깔며 손도 슬그머니 내려 버린다. '“어디가 아픈지 말해 줘, 비상약 찾아볼게.”'“…….”'“우선은 불부터 켜자. 어두워서…….”'녀석의 긴장이 느껴진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품에 안겨서야 편안히 잠들던 그 작은 녀석이,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한 것이. '“켜지 마라, 서연아.”'“왜?”'“지금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다.”'“……!”'돌아서려던 녀석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놀란 탓이다. '“왜……, 왜 내 얼굴 보기 싫은 건데?”'이건 뭘까, 투정 같기도 하고 미안함 같기도 한. 내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날 떠보는 듯한 녀석의 목소리가 요염하게 느껴지는 것은.'“혹시 현제 오빠와 나……, 본 거야?” '“봤다면?”'“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그래도 된다고 허락한 적도 없어. 그런데 왜 오빤 내가 잘못한 거처럼 날 탓해?”'도발이다. 녀석이 알든 모르든, 이건 명백한 도발이다. 낮은 목소리지만, 수굿이 숙인 녀석의 시선이 내게 닿아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녀석은 내가 저를 탓한다고 하지만, 이건 분명 녀석이 날 탓하는 목소리이다. '“그렇다 해도 왜 내 얼굴 보기 싫은 건데? 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남자와 키스? 그게 뭐 어때서? 그러는 오빤 다른 여자랑 키스한 적 없어?”'도전이다. 녀석이 도자기 인형같이 단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 가슴께까지 오는 키로 암팡지게 날 노려본다. 문득 이 녀석이 키스할 때의 표정은 어떨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다. '현제는 보았겠지? 어째서 그 녀석은 볼 수 있는 표정을 난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것인지…….'“술, 얼마나 마셨지?”'“칵테일 한 잔밖에 안 마셨어.”'녀석의 작고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못마땅함을 드러낸다.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지 말란 반항이다. 어린애 취급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젠 더 이상 녀석을 어린애로 보기가 어렵다. 불가능하다.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과 한 팔에 쏙 들어올 것 같은 잘록한 허리, 보기 좋게 볼록한 엉덩이를 바라보는 내 눈은 이미 남자의 것일 뿐이다. '녀석이 교복을 입는 동안엔 어찌어찌 잘 버틴 것도 같다. 그러나 녀석이 졸업을 앞둔 지난 2달 동안 내 의지는 극에 달할 정도로 약해졌다. 새해가 되어 녀석이 스무 살이 되었단 사실만으로도 나는 극에 달했다. 의지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했었나 싶을 정도로 삽시간에 무너졌다. 그런 거에 비하면 오늘까지 남자의 욕망을 감출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녀석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 한 장 때문이었다. '“현제 오빠가 생일 파티 해줬어. 둘뿐이긴 했지만, 오빠가 잊어버린 내 생일을 현제 오빠가 챙겨 줬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생일 선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