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파란 하늘은 속이 보이는 유리구슬처럼 맑다. 그 안을 솜씨 없이 찢은 붙인 솜뭉치처럼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오륜 호텔로 가주세요.”'막 공항을 빠져나온 그녀는 택시에 올라탔다. 그녀는 호텔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시원한 물줄기에 달라붙은 피로를 씻어 내렸다.'“나 이러다 천벌 받겠지? 지옥 중에 열화 지옥. 거기가 최악이라고 하던데?”'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욕실을 나오는 그녀의 얼굴이 왠지 불안해 보인다. 젖은 머리를 말리던 그녀는 거치적거리는 왼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약혼자가 끼워 준 반지가 그 손에 있었다. 약혼자 집과 그녀의 집은 증조부 때부터 사이가 돈독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대에 이르러서도 두 집안은 여전히 ‘완전절친’ 집안으로 소문났다. 아버지는 아버지끼리 어머니는 어머니끼리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뿐인 오빠까지 약혼자와는 동갑내기로 돈독한 우정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자식끼리 결혼 시키자는 말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결혼시키자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그녀를 몰아세우고 닦달하기까지 했다. 가족들이 나서서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 약혼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약혼자가 고루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라 평생 속 썩을 일이 없을 거라는 그들의 설득에 귀가 솔깃했다. 결국 그녀가 승낙했다. 약혼자는 미국으로 건너와 약혼반지를 나눠 낀 바로 그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미국에 있기로 하였다. 그것이 2년 전의 일이다.'“하지만 이젠 아니야!”'그녀의 눈빛이 당돌하게 빛났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좋아하는 마음 이상을 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속여 가면서까지 결혼한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스치듯 약혼자의 얼굴과 가족들 얼굴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그래도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내가 아니지.”'그녀는 미국에서부터 끼고 왔던 약혼반지를 냉정하게 잡아 뺐다. 잡아 뺀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는 결심이 선 듯 그것을 힘껏 던져 버렸다. 가방을 향해 반지가 날아갔다. 그녀의 결심처럼 반지가 그 안에 처박혔다. 지난 2년간 그녀의 마음을 옥죄고 감정을 구속시켰던 반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속이 뻥 뚫렸다.'‘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던데? 이 기쁨을 누구하고 나누지?’'휴대폰을 든 그녀는 해외 어느 지역 번호를 중얼거리며 버튼을 눌렀다. 보나마나 퉁명스러울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한 달에 한 번만 전화하라고 했어 안 했어?]'“나 파혼할 거야!”'[……?]'“나 파혼할 거라고!”'못 알아들은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해 주었다.'[오늘은 뭐야?]'“뭐가 뭐야?”'[뭘 마셨냐고.]'기가 막혔다. 전화선을 타고 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실토하란다.'“술 먹었냐고 묻는 거야?”'[위스키? 브랜디? 럼? 진? 보드카? 데킬라? 뭐야?]'파혼할 거라는데 주정뱅이 취급이다. 하지만 그가 열거한 술은 그녀가 평소에 즐겨 마시는 것들이기는 하였다.'“나 정말 파혼할 거라니까?”'그녀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퍼 드신 모양이군. 제정신 아닌 걸 보니.]'워낙 까칠한 친구라 저것보다 더 심한 말을 해도 그다지 화나지 않는다. 그의 공격이 더 심해지기 전에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다.'“도와줘. 은이반 헬프 미! 지원 사격 바람. 나 지금 한국이다 오버. 약혼자 집에 파혼하겠다고 말씀 드릴거야. 그러니까 제발, 헬프 미. 해방군이 되려는 도레미를 위하여 네가 필요해!”'[끊어!]'매정한 친구가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투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내심 불안해하던 레미의 입가에 희망찬 미소가 일렁거렸다. 올 생각이 없었다면 ‘안 가’ 하고 말 인간이다. 안 온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오겠다는 말로 해석하면 되었다. 덕분에 2년 가까이 못 봤던 순정 만화 속 백마 탄 왕자님처럼 잘생긴 얼굴을 보게 생겼다. 성격은 저리 차가워도 그는 그녀의 완전 절친이었다. 차갑긴 해도 천군만마의 능력을 갖춘 친구가 달려와 줄 거라고 믿기에 레미는 두 팔을 들어 만세를 외쳤다.'“만세! 엄마, 아빠, 오빠가 파혼한 사실을 알게 되면…… 맞아 죽을 일만 남았지만. 그래도 야호!”'세 살 먹은 아이라도 이 정도 사고면 다리 하나 부러지는 거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돌처럼 굳힌 터라 물은 이미 엎질러진 거나 다름없었다. 팔자 좋게 입을 쩍 벌린 레미는 대자로 펼친 몸을 침대 위로 날렸다.''그것은 파혼하러 한국에 나온 지 딱 이 주일만의 일이었다. 파혼하려던 그녀는, 파혼 당했다! 파혼하러 왔는데 도리어 파혼 당했다면 누가 믿어 줄까? 미국에서 득달 같이 달려온 가족은 그녀를 의심했다. 그녀가 먼저 파혼하자고 한 줄 알고 가족들은 똘똘 뭉쳐 레미를 본체만체했다. 그러다 약혼자가 먼저 파혼을 선언한 것을 알고는 그제야 바라보는 눈길에 물기와 동정심이 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한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날이 선 엄마가 파혼당한 레미를 가재미눈을 하고 째려보았다.'“너 우리 몰래 그동안 지후한테 파혼했으면 하는 눈치를 준 거 아니야?”'“엄만 내 성격 몰라요? 내가 먼저 파혼하자고 하면했지 그런 유치한 수는 안 써요.”'운 좋게 지후가 먼저 파혼하자고 해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 때문에 레미는 파혼하러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쏙 뺐다.'“우리 탓으로 돌릴 생각이라면 꿈 깨. 그래서 말인데, 너 1년간 미국으론 출입 금지야. 대신 네가 바라던 그 독립 그거 시켜 줄게.”'“약혼을 깬 건 지후 오빠인데 내가 왜 출입 금지를 당해야 돼?”'“그 책임감 강한 지후가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데에는 너도 뭔가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게 우리 생각이야.”'“엄마!”'잔뜩 인상을 쓴 척 레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다! 기숙사를 제외한 집 밖의 독립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하신 분이다. 단식 투쟁까지 불사하며 독립시켜 달라고 애원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파혼 당하고 이런 횡재수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대형사고 한번 칠 걸 잘못했다. 아빠가 넌지시 엄마 편을 들고 나섰다. '“여보, 군대 보낸 셈치고 2년 잡아.”'“아빠!”'땡큐 파파. 한 10년 정도 넉넉히 잡으셔도 됩니다. 밉살맞은 오빠야 말로 확실한 부모님 편 인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제대하면 보자, 도레미.”'“오빠!”'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오빠 장례식 때 보자고 해도 되는데. 그러나 지금은 되도록 우울한 척 할 때였다. 진실이 들통 나면 그날로 그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실감나는 연기력을 선보여야 할 때다. 파혼으로 양쪽 집안의 화기애애하던 우애는 박살나고 대신 살벌한 분노와 배신감만이 그 자릴 메우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였던 지후는 현재 레미 가족에게 있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으로 통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모두에게 미안했지만 진실은 어둠 저편에 꽁꽁 숨겨두는 게 현명했다. 연기에 몰입한 레미의 눈빛이 독해졌다. 새치기로 파혼당한 것도 밤잠 설칠 정도로 분하고 억울할 판에 가족한테까지 공격당하자 성질이 불끈 치솟았다.'“제 앞에 계신 아빠, 엄마, 오빠. 여기 계신 세 분이 지후 오빠와 절 약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들 아니신가요?”'“좋다고 넙죽 약혼반지 낀 건 너야.”'오늘은 정말이지 계급장 떼고 오빠와 맞장 뜨고 싶다.'“그야, 저보다 어른이신 세 분께서 집안끼리 잘 알고 하니 시집살이 플러스 마음고생은 안 할 거라고 강력히 부추겼잖아.”'“부추겼다고는 하지만. 여보, 최종 선택은 레미가 했죠? 내 말이 맞죠?”'아빠를 끌어들인 엄마는 모든 잘못은 레미에게 있다고 피력했다. '“가족들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 덕분으로다가, 효도하는 심정으로다가…….”'총알보다 무서운 여섯 개의 눈동자가 짠 듯 레미의 얼굴에 닿았다. 두려움에 할 말을 잃은 레미는 여차하면 도망치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좋아요! 아, 좋다고요. 솔직히 말하면 약혼자 아니, 전 약혼자이신 지후 오빠면 남편감으로 적당하다 싶었어요. 됐어요?”'자신의 연기에 푹 빠진 레미는 이번에는 적당이 슬픈 척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것이 통했는지 가족들 낯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적당하긴 뭘 적당해. 엄마 아빠랑 특히 도! 시! 라! 내 아들 눈이 삐어서 그런 거니까 레미 네가 이해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