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차라리 서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싸운 후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모든 정이 떨어진 후에 헤어지는 게 나을 걸 그랬다. 그럼 지금까지 이렇게 그를 그리고 있을 일 같은 건 없을 텐데. 그랬다면 그렇게 수준 낮은 배신을 당하고도 아직까지 그의 웃는 모습만을, 친절하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그의 입술이, 그의 팔이, 그의 가슴이, 안으로 들어왔던 그의 뜨거운 체온이 모두 몸에 무섭도록 각인되어 있지는 않을 텐데.'한 달이었나, 두 달이었나.'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영현은 아파트에 틀어박혀 지냈다. 깨면 씻고, 씻은 후에는 그대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사이에 술을 마시고 혼자 담배를 배웠다. 너무 답답해서, 괴로워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런 것에라도 의존하고 싶었다.'처음 한 달간은 지인들이 아파트 초인종을 눌러댔지만, 그녀는 목소리도 내지 않고서 쭈그리고 앉아 숨어버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어느 날, 그 남자가 불쑥 찾아왔다. ‘갑자기’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헌과 헤어진 후 한 달 동안 수없이 아파트 앞을 드나들던 지인 중에서 그 남자, 서태준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상헌과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는 상헌이 사라진 순간 함께 사라졌었다. '혹시 상헌 씨가?'죽어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한 가닥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술이 드나드는 것 외에는 근 두 달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아파트 문을 벌컥 열었다.'“상헌 선배! 상헌 선배가……!”'영현은 비틀거리며 태준의 옷깃을 틀어쥐고서 쥐어짜듯 매달렸다.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아서 속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흑, 흐윽, 윽!”'도무지 막을 수 없는, 듣기에도 이상한 흐느낌소리만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터져 나온 눈물 때문에 앞이 어른거렸다. 몇 달 동안 술에 절어버린 뇌는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휘청거리는 영현의 몸을 앞의 남자가 단단한 팔로 받쳐주었다. 그는 영현의 팔을 강하게 잡고서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어쩐지 슬픈 눈이었다. 진한 커피색의 눈동자가, 이따금씩 미소를 짓던 때 외에는 늘 차갑고 낯설기만 하던 그 눈동자가 젖어 있는 것 같았다.'영현은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쳐내고 그의 두 팔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미친 듯 매달려 소리쳤다.'“선배가 보낸 거죠? 그렇죠? 나 보고 싶다고 한 거 맞죠? 잘못했다고 한 거죠? 맞잖아요. 이제 나한테…… 나한테 온다고 한 거 맞죠? 맞죠?”'제발 그렇다고 말해달라며 영현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안기듯 매달려서, 그의 모직코트를 온통 눈물로 더럽히며 몸부림치듯 사정했다.'“그렇다고 해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하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그는 미동도 없었다. 미친 듯 매달리는 것도, 할퀴듯 꼬집는 것도, 그 팔을 원망하듯 움켜쥐는 것도 모두 다 참았다. 작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박힌 바위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결국 지쳐버린 건 영현 쪽이었다. 그녀의 몸이 스르르 허물어져 내려 태준의 발치에 주저앉았다. 흐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어깨가 정처 없이 떨렸다.'“제발…… 말해주세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죽기 전에…….”'순간 며칠 동안 심하게 약해진 영현으로서는 견디기조차 벅찬 어떤 힘이 그녀의 몸을 벌컥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아파트 안으로 밀어붙였다. 너무 아파서 영현은 엉엉 울어버렸다. 하지만 고통에 취한 뇌는 여전히 어떤 것도 제대로 인식시켜주지 않았다. 판단의 중추감각이 마비되어버린 것처럼 오로지 본능적인 통각만이 느껴졌다. 억센 힘에 던져져 어딘가에 부딪쳤다. 등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볼썽사납게 팽개쳐진 것 같았다. 꼴사나울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으로 바닥에 버려진 영현의 몸을 세찬 힘이 압박해왔다.'영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자신의 팔을 고정시켜 누르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대신 죽여주려는 건가요?”'남자의 눈이 경악하듯 커진 것 같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져서 영현은 엷게 웃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상헌의 친구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이거나, 혹은 부모님이 보내준 누군가이거나.'딸의 고통을 하늘에 있는 부모님께서 거두어주려고 보내주신 게 아닐까 하고 영현은 생각했다.'“고마워요. 나를 죽여줘요.”'영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자신의 목에 얹었다. 커다란 손은 차가웠다. 자신만큼이나 질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아요.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요. 난 도저히 내 손으로 내가 죽을 수 없어. 그러니 당신이 좀 도와줘.'“부탁이에요. 나 좀…… 죽여줘요.”'그의 커다란 손에 그녀의 가는 목이 들어찼다. 엄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걸로 피가 흐르는 곳을 눌러주면 되는 거야. 영현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손가락이 목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한 남자의 손가락이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감는 순간…….'목에 닿아 있던 손이 영현의 몸을 홱 끌어당겨 숨 막히도록 거칠게 끌어안아왔다. 견딜 수 없는 압박감으로 영현이 경악하듯 눈을 크게 뜬 순간, 남자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와락 덮었다. 차가운 남자의 입술 살갗, 그러나 쏟아지며 파고들어오는 숨결은 너무나 뜨거운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남은 생을 스스로 포기했던 영현의 생명의 심지에 불을 붙일 만큼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