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아이와 눈을 맞추며 놀고 있는데 초인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이에 분명 아이가 있으니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들겨 달라고 붉은 줄까지 쳐놓고 써 놓았건만 꼭 하루에 한 번은 요란한 초인종 소리에 깜짝깜짝 놀란다.'“어우, 또 누구야?”'채원은 누웠던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매만졌다. 아침 아홉시가 막 넘은 시간이라 이른 방문자가 예상되지 않았다.'“누구세요?”'[변호사사무실에서 나왔습니다.]'“변호사 사무실?”'뜻밖의 방문자였지만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밖에는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불현듯 두려움이 들어 문을 슬그머니 닫으며 작은 틈만 보이게 했지만, 밖에 선 남자는 별다른 내색 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채원 씨 맞습니까?”'“네.”'“본인 되세요?”'“그런데요?”'그녀에게 흰색의 봉인된 봉투를 건넸다.'“잘 받았다는 서명 부탁드립니다.”'사인을 해달라며 배송확인을 부탁했다. 볼펜을 넘겨받고 아무렇게나 제 이름을 휘갈긴 후 그녀는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하얀 봉투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뭐지?”'그녀는 봉투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봉인된 부분에 찍힌 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문이긴 했지만 문양이 몹시 눈에 익었다.'崔元碩.'돌아가신 건휘의 아버지 이름이었다. 그녀가 일 년 남짓 모셨던 상관이기도 했고.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분명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왔다는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기에 제게 온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에게서 이런 물건을 받는다는 것은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하아!”'봉투 안에서 나온 서류에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제주도 목장의 등기서류였다. 소유자의 이름을 살피던 중, 마지막 소유주가 그녀의 이름으로 된 것을 확인한 순간 누군가 강하게 머리를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걸 왜…….”'누군가 조른 것처럼 목이 콱 막혔다. 첫 장의 서류를 보고 충격에 휩싸인 그녀는 다급하게 뒷장의 서류를 바라본 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바람이의 소유자가 그녀임을 증명해주는 계약서부터, 마주임을 증명해주는 공증서류까지…… 서류를 볼수록 그녀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최 회장의 한국그룹의 지분 양도증서까지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보낸 것이 이제는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굳이 보러 오지도 않았고, 화해의 제스처도 없었다. 그런데 이걸 보내왔다. 죽은 분에게 받는 호의는 설명조차 들을 수 없는데……. 의문은 커져갔다. 최 회장이 미리 준비해 둔 서류가 하필 왜 오늘 도착했을까. 마치 자신의 미리 죽음을 알기라도 한 듯 직접 전해주는 대신 변호사 사무실에 맡겼다는 것도 의문이었다.'그 의문은 마지막 장에서 풀려버렸다. 채원은 손수 한자 한자 눌러 쓴 편지를 보며 수많은 감정이 밀려들었다. 흑, 그녀의 입에서 단발마의 신음과 함께 편지를 든 손이 떨려 왔다.''이채원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며느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마지막까지 고민이 되는구나.'아가.'너에게 빼앗은 것이 참 많은데, 이자도 없이 돌려줘서 미안하구나.'시간이 지나면 그 시절,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하게 되더라. '후회를 남기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았지만 뒤돌아보면 낯을 들 수 없게 '부끄러운 후회가 내 삶을 가득 채워 회한만 가득하단다.''얼굴을 보며 사과를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용기조차 내지 못하며'겨우 편지라는 것을 선택했는지. 내가 쓴 것을 돌아보면 차마 보내지 못할 것 같아'그냥 써지는 대로 이어가련다.''아가.'혼자 몸으로 아이를 가지고 낳을 때까지 많은 고민도 있었을 것이고 갈등도 '있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낳아주어 고맙구나.'너 몰래 몇 번 가서 보았는데 그것은 용서해줄 줄로 믿는다.'나도 첫 손주는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맘 약한 할아버지더구나.'한 줌도 안 되는 어린애가 링거를 꽂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내가 죗값을 받는구나,'생각이 들었다. ''喜願.'기쁨을 원한다는 뜻으로 내가 지은 아이이름인데, 맘에 드는지 모르겠다.'상진 군에게 부탁을 해서 간신히 건넨 이름이지만, 내가 정성을 다해 '지었다는 것만은 기억해 다오. 맘에 들지 않아도 아이를 이 이름으로 불러준다면'더는 바랄 것이 없구나.''할 말은 참 많은데, 일일이 내 잘못을 적자니 송구하고 민망해 '지면임에도 맘이 착잡하구나.'미안하다, 채원아!'내 아집으로 인해 널 끝내 며느리라고 불러주지도 못했지만'그래도 마음에서는 이미 내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그러니 서운해도 건휘를 봐서 참아다오.''어떻게 될지 몰라, 미리 써놓기는 하지만'지면이 아닌 내 손으로 이 편지를 전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네 손을 꼭 잡고 내 잘못을 용서 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내 진심으로 너에게 고개를 숙이마.''인연이 이렇게 연결될 줄 알았다면'이토록 참혹한 결과가 벌어질 줄 알았다면'수많은 가정을 해봐도 내 잘못임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더 할 말이 없구나. ''이 편지가 네 손에 닿는다면…… 불행이 되풀이 됐다는 말이겠지.'건휘를 잘 부탁한다.'나 때문에 아프지 않게'나 때문에 흔들리지 않게'아기, 너와 희원이가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렴.''후회도 많고, 미련도 많은 삶이지만'어쩌면 이렇게 가는 것도 좋을 듯 하구나.'네 아버지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갚는다고 한다면 '그래도 용서를 하지 못할까?''채원아!'원래부터 네 것이었던 것을 이제야 돌려줘 미안하구나.'바람이에 대한 네 애틋한 마음을 기억한다. 잘 키워서 건휘에게도 '말이 주는 기쁨을 알려주길 바란다.'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날이 주주총회 당일이겠지.'이 안에 든 내 지분으로 네 남편에게 날개를 달아다오.'건휘도, 건영이도 내 자식이기에'굳이 힘든 일을 너에게 부탁하게 되는구나.''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용서해라.'''희원의 이름을 지어주신 분은 작명소의 사람이 아닌 최 회장이었다. 채원은 미사여구도 없이 직설적으로 써진 글귀를 눈으로 읽으며 흐느낌을 토해냈다. 자신이 죽는 것을 아셨구나!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쓰인 말에 그녀는 오열을 터트렸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최 회장의 죽음으로 그녀의 아버지 죽음에 대해 용서를 빈다는 글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가 겁에 질려버렸다.'“건휘 씨!”'그가 필요했다. 무작정 쓰인 편지만 믿고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