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채원 씨 들어오세요.”'내시경을 하기 위해 내과를 들렀지만, 먼저 산부인과 진료부터 받아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떠밀리듯 온 곳에서 그녀의 이름이 불려졌다. 아이를 가진 여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어색하게 앉아 있던 채원이 간호사가 안내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이채원 씨?”'“네.”'“소변검사 결과로는 임신이네요. 축하드려요!”'의사의 딱딱한 말투를 그녀는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닐 거라고 수도 없이 되뇌며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는데, 그런 노력이 허망하게 임신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의사가 원망스러웠다.'“뭐가 잘못됐나요?”'의사의 말에 채원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손으로 가렸다. 얼굴을 손에 묻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이, 아이라고? 제 손으로 잔인하게 잘라버린 인연이었다. 그를 생각한다는 말은 어쩌면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옆에서 힘들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의 아버지가 엮여 있다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도망쳐 왔는데!'이렇게 잡히는 건가!'아이를 핑계로 그를 잡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러나. 어떻게 떠나왔는데! 채원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려 슬그머니 배에 가져다 댔다.'듣지 마!'아직 감정도 없고 감각도 없으며, 인지하지도 못한다고 믿고 싶었다. 제 잔인함이 치 떨리게 싫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 가지고 아이를 낳을 용기가 없었다. 거기다 최원석 회장의 손자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수술하고 싶습니다.”'채원은 모진소리를 하고 말았다. 낳아서 키울 생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의사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잘못을 지적하듯 침묵을 고수하는 의사에게 채원은 온 힘을 다해 긁어모은 모진 마음이 흔들릴까 봐 빠르게 말을 했다.'“수술해주세요, 선생님.”'“강간당하셨습니까?”'“네?”'전혀 뜻밖의 질문이었다. 감정조차 섞이지 않은 단순한 질문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면 낙태를 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서, 선생님!”'“낙태는 현행법으로 불법입니다. 저희 병원에서는 법이 허용하는 이유 말고는 낙태수술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잔인할 정도로 매정한 말에 채원은 눈앞이 아찔했다. '“성관계를 가지면 아이가 생긴다는 기초적인 상식도 없었나요? 아이를 가지기 싫었다면 피임을 철저하게 하셨어야죠!”'“아, 안 될까요?”'“안 됩니다.”'의사는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고 딱 잘라 거부했다. 두말도 붙이지 못하게 매몰찬 어조에 그녀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임신 7주입니다. 나가시면 간호사가 산모수첩을 줄 테니, 정기적으로 검사받으러 오세요. 아이 지울 생각부터 하지 마시고, 아이 아빠와 상의해 보세요. 그럼 다음 환자!”'낙태라는 말을 꺼내서인가.'의사선생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냉담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더는 사정도 할 수 없었고, 채원은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벌 받는 건가?'그를 매몰차게 버린 대가라면…… 기꺼이 받겠다는 착한 마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정작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데, 왜 자신만 진창에서 굴러야 하나 원망스럽기만 했다.'이럴 수 없는 거잖아요.'채원은 병원에서 나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을 쏟아냈다. '나한테 더 가혹하냐고요! 대체!'아직 건휘에 대한 감정도 정리가 되지 않아 힘든데, 아이라니! 이미 7주로 접어든 아이를 뱃속에 넣고 자신을 비탄하는 말을 꺼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채원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져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제가 자른 인연인데…… 새로운 인연이 생겨났다. 마치 그녀의 행동에 책임이라도 지라는 듯.'아픈 사랑도 그녀를 버겁게 만드는데, 아이를 받아들이라는 말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가혹했다. 채원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고 원망을 하듯 한껏 목을 젖혀 하늘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