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심장으로 기억하다 2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창문 사이로 비쳐오는 검은 빛을 보며 밤이 왔구나, 라는 것을 추측할 뿐이다. 녀석은 몇 시간 전에, 나에게 ‘저녁 밥’이라는 것을 내려놓고 문을 닫아버렸다. 문이 닫히기 전,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제발 내보내 달라고 소리쳤지만, 녀석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입을 옷가지를 챙겼다. 하얀 이불만으로 알몸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추리닝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얼른 입었다. 여기저기 먼지가 달라붙긴 했지만 입을 만 했다. 추리닝을 입은 나는 내가 가지고 들어온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낡아빠진 침대 시트 위로 올라갔다. 소리친다 해도 녀석에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눈과 귀와 입을 꼭꼭 틀어막고 손에 쥐어진 물건들을 던지기 바쁠 테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아, 한숨이 튀어나왔다. 한쪽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고프겠다.” '나도 참, 바보 같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남자와 아이 걱정을 하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했을까,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마주쳐야 했을까.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녀석을 이렇게 만든 건 나인데, 녀석을 저렇게 만들어 버린 건 오로지 나 때문인데. 그런데도 나는 너에게 담담하다. 아무런 느낌도, 두근거림도 나타나지 않다. 너의 그 지독한 사랑 법에 나는 질렸다. 너의 고통이 나의 살결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러니까, 왜 나 같은 걸 좋아해.”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햇빛 때문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길게 하품을 늘어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꿈이 아니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자고 일어나면 꿈일 거야, 라고 생각했던 나의 상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방 문 앞에 아침상이 놓여 있었다. 하얀 쌀밥과 김치 그리고 바싹 구운 햄 조각들. 녀석이 차린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잠이 든 동안에 몰래 들어왔던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상 앞으로 걸어갔다. 딱딱하게 굳은 숟가락이 밉게만 보인다. 나는 숟가락을 들다, 다시 상 위에 내려놓았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야.” '쿵쿵쿵. '“강찬민.” '쿵쿵쿵. '“문 열어, 나 화장실 가고 싶어.” '“…….” '“화장실만 갈게. 갔다가 다시 들어올 테니까, 문 열어.” '역시나 방문 밖에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거지. 무섭다. 이제는 두렵다. 눈물 따위는 흐르지 않았지만 온몸의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소유욕에 나는 치가 떨린다. 너에게, 너란 녀석에게. '“……나와.” '그런데 그때였다. 저벅저벅, 녀석의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문이 열리는 순간 녀석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한숨도 못 잔 모양인지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은 부엌방과 다르게 따뜻했다. 은은한 주황빛의 조명이, 왠지 따뜻하게 보였다. 온화하고 따사로운. 하지만 그 온화함과 따사로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볼일을 보고 세수를 하려는데 녀석이 화장실문을 쿵쿵쿵 두드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한 뒤, 나는 화장실을 나왔다. 녀석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다시 들어가.” '“…….” '“들어가라고.” '“……내가 네 개야?”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순간 흠칫, 하고 놀랬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나는 또다시 저 어두컴컴한 부엌방으로 들어가게 될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제는, 녀석에게서. 도망쳐야 해.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고,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하고.” '“…….”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어?” '“경규원.” '“너를 보면, 불쌍해.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난 그냥, 난 그냥 네가 불쌍해.” '“여태까지 나랑 같이 있던 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다. 이거야?” '“아마도.”'그리고 그때였다. 녀석의 큼지막한 손이 내 눈을 향해 다가왔다.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고개가 옆으로 돌려졌다. 볼이 화끈거렸다. 나는 녀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려.” '“뭐?” '“차라리 때려.” '나는 한없이 잔인해지는 방법을 택했다. 너에게 아픔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네가 화내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너를 도발시킨다. 한때마다 너만을 생각하고, 너를 좋아했던 경규원을 잃게 하지 말아 줘. '“나 그냥, 이제 놓아 줘.” '“…….” '“이제는 지겨워.” '“…….”“더 이상, 나도, 너도, 상처받는 거 싫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추억을, 그 사람한테서 찾지 않게 해줘. '“웃기지 마.” '“…….”“항상 상처 받는 쪽은, 내 쪽이었어.” '녀석은 나의 간절한 바람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너는 나에게 차가운 눈을 지으며 무덤덤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녀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죄를 지은 것이 없어.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녀석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홍빛 입술이 열리더니 픽, 하고 웃음을 뱉는다. '“나 때문에 운 적 있어?” '“…….”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내 생각 난 적 있어?” '“…….” '“내 전화 오길 기다려 본 적 있어?” '“…….” '“밤늦게 들어오면 걱정 돼서 미쳐 본 적 있어?” '놀랍게도, 녀석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그 눈물도 이제는 믿을 수 없어, 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녀석이 두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나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 '“내가 그만두자고 하기 전엔, 절대 못 해, 안 돼.” '“……너 미쳤어.”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너 진짜, 미쳤어.” '“그러니까, 네가 치유해 줘야지.” '나는 내 어깨를 꽉 잡은 녀석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리고 몸을 세게 비틀어서 방향을 돌렸다. 내가 방향을 돌린 쪽은 부엌방이 아니었다. 오로지 현관문. 이곳을 빠져나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가 싸늘해지는 것 같더니, 곧 녀석의 검은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나, 제발 놓아 줘.” '“놓으면? 놓으면 어디로 갈 건데, 그 남자 집에 가려고?” '“…….” '“내가 놓아줄 것 같아?” '내 어깨를 잡은 녀석의 손이 어느새 내 목덜미를 휘감고 있었다. 녀석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녀석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품에서 빠져나오려다가 녀석의 발에 걸려 넘어져 나는 바닥에 눕고 말았다. 녀석이 내 위로 올라왔다. '“하지 마! 이러지 마, 제발!” '녀석은 아무런 표정 없이 나의 눈을 바라보며 두 손을 거칠게 움직였다. 나는 녀석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추리닝은 녀석의 손에 의해서 거칠게 벗겨지고 있었다. 어제의 아픔이 채 가시지가 않아서 나는 두 다리에 힘을 꼭 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녀석은 눈치를 챘는지 옷을 거칠게 벗기던 손을 아래로 내려 두 다리 사이를 벌리려 했다. 하지 말라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자 녀석은 두 다리를 벌리려고 했던 손을 다시 들어 내 입을 막아버렸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야 했다.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녀석의 성욕을 채워줄 도구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녀석이 무서웠다. 두려웠다.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악이고 지옥이었다.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손은 가슴 부근에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찬민아, 엄마 왔…….” '“…….” '“너, 규원이니?” '녀석의 엄마의 등장이었다. 녀석은 순간 내 가슴에서 제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 역시, 놀란 눈으로 찬민이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민이 아래에 눕힌 나를. 상체가 다 벗겨진 나를. 두 눈 속에는 놀라움과 징그럽다는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내일 온다고 했잖아.”'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위에서 내려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면서 녀석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됐어……그런데 너희 둘 여기서 뭐하는 거니?” '“그냥, 놀이.”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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