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동안 다섯 번을 드나드는 집이지만 질투와 술에 살짝 취해 얼떨결에 “좋아해.”라고 고백한 그날 이후 처음 오는 거였다. 정우와 사귄다는 자각이 들자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긴장으로 떨려 번호가 제대로 눌러지지 않았다. 꾹꾹 손가락 끝에 잔뜩 힘을 준 채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앞에 정우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안녕.”' 기다렸다는 듯 서 있는 정우를 보자 수진은 어색하게 한쪽 손을 들고 흔들며 인사했다. 집자체가 워낙 조용하다 보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엘리베이터의 도착 음이 꽤나 크게 들리는 편이었다. 당연히 수진이 왔을 거라는 생각에 현관에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수진이라는 것은 그의 예상과 딱 맞아떨어졌지만, 안녕? 그 어색한 인사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싶었다.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수진의 반응에 정우가 그녀의 어색한 말투를 그대로 따라 안녕이라고 말하자 다시 안녕, 하는 말이 되돌아왔다. 정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어? 그 옷 입었네.”' 정우기 픽, 웃는 것에 어색함을 떨친 수진이 어그 부츠를 흉하지 않게 벗으며 정우가 입고 있는 니트를 보며 물었다. 정우는 수진의 시선에 따라 니트의 어깨 부분을 뒤로 살짝 넘기며 옷을 매만졌다. '“어울려?”' 정우가 묻자 수진이 멍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옷이 그에게 어울리느냐고? 그게 할 질문인가 싶었다. 수진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넘치게 섹시하고 넘치게 근사하다. 워싱이 많이 들어간 하늘색의 연한 스트레이트진과 그러데이션 된 니트는 꼭 맞춰 산 듯 잘 어울렸다. 하체에 딱 맞게 피트 되는 스트레이트 진과 반대로 루즈하게 떨어지는 니트는 색상을 맞춰서인지 그의 큰 키를 좀 더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수진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정우를 5초 이상 바라보았다는 게 힘들었다. 멋있고 근사하긴 한데 그 성긴 짜임의 니트를 상의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하나만 달랑 걸쳤다는 게 문제였다. 가슴 쪽으로 깊이 파여진 니트 때문에 수진이 항상 감탄하는 그의 갈라진 가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햇빛이라고는 하나도 보지 않는 듯한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에 감탄하고 넓은 어깨와 평행을 맞춘 듯 일자로 예쁘게 뻗은 쇄골에 또 감탄했다. 안에다 면 티셔츠나 셔츠를 받쳐 입으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눈앞에 서 있는 정우는 수진이 감당하기에는 힘들게 섹시했다. '“바지를 잘 맞춰 입어서, 마음에 들어?”'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람의 인상이 웃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지만 정우의 경우에는 너무 달라졌다. 보기 좋게 부드러워진 눈빛이 자꾸 수진을 따라다녔다. 차라리 말을 하지 저렇게 진한 시선을 받아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아, 오늘은 학교 안 나가?”'“연초까지 쭉 한가해.”'“그렇구나, 나는 이제부터 할 일 할게.”' 옷차림부터 시선까지 수진을 당황케 하는 것들뿐이었다. 생각하는 게 얼굴에 드러나는 타입이라 수진은 얼른 정우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서 있는 곳을 피해 주방으로 갔다. 점퍼와 가방을 벗어 의자에 올려놓고 식탁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돌려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무스크 향이 곁에서 풍겨왔다. '“할 일이 뭔데?”'“그야 청소도 하고 빨래랑 설거지지.”' 그걸 하라고 시킨 당사자가 새삼스럽게 물어오자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정우가 식탁 위를 손톱 끝으로 톡, 톡, 톡, 치면서 말했다. '“장난해?”'“내가? 뭘?”' 박자를 맞추며 톡, 톡, 톡, 거리는 소리가 자꾸 수진을 추궁하는 듯 끊이지 않고 들리고 있었다. 장난이라니? 자신이 선물해 준 옷을 입은 정우를 보고 속으로 감탄한 게 창피하게도 오늘 이곳에 와서 한 일의 전부였다. 식탁 위를 두드리던 손길을 멈추고 정우가 수진의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붙어 서며 귓가에 소곤거렸다.'“날 하루 동안 방치한 걸 책임져야지.”' 하루 동안의 방치라니, 어제 헤어진 시간이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으니 혼자 있었던 시간이라고는 따져 봐도 채 12시간이 되질 않는다. 거기다 잠잔 시간을 제외하면 5시간이 될까 싶었다. 터무니없는 과장에 웃음이 났다. '“어제 일 때문에 혹시 삐친 거야?”'“삐쳤다기보다는 그냥 부족한 거지.”'“아, 잠깐.”' 수진의 목덜미에 정우가 너무 자연스럽게 얼굴을 묻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 폴라티셔츠를 입은 것이 정말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파인 옷이었다면 정우의 숨결이 고스란히 피부에 닿을 뻔했다. 수진의 옷깃 위로 길게 숨을 들이켜던 정우가 말했다. '“향수 뿌리고 왔군.”'“……그거야. 당연한 거잖아.”'“당연한 거야? 음. 기분 좋다.”'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이 사라지는 듯싶더니 곧 수진의 입술 위로 느껴졌다. 부족했다는 말의 뜻을 가르쳐 주려는 듯 정우의 키스는 여유가 없었다. 정우의 거칠고 뜨거운 키스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때 수진의 다리 사이로 정우의 긴 다리가 들어와 몸을 밀착시켰다. 뒤로 주춤대며 피해 보지만 식탁 때문에 더 이상 물러날 때가 없는 터라 정우의 힘에 의해 상체가 자꾸 뒤로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의자 등받이의 딱딱한 부분에 쓸려 등이 아파왔다. 정우랑 키스할 때마다 몸에 상처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이만저만 아픈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작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수진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키스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안 정우가 얼른 입술을 떼었다. 얼굴을 가득 찌푸린 채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자 정우가 물었다.'“왜?”'“의자에 등이 쓸려 아파.”'“진짜? 보여줘.”'“아, 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뭐하는 거야, 야!”' 아프다는 소리에 정우가 티셔츠 자락을 손으로 들치려고 하자 수진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올라가는 옷자락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장난이 가득 차 있었다.'“옷 다 늘어나거든. 손 치워.”'“옷 늘어나는 게 대수야? 아프다면서, 보자니까.”'“안 아퍼, 안 아프다고!”' 수진이 티셔츠 자락을 쥔 양손에 힘을 가득 쥔 채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능글거리며 말을 시작하면 절대 이길 수 없는 걸 아는 수진으로서는 정우의 손에 의해 위로 말려 올라가는 티셔츠를 사수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인터넷에서 산 싸구려 골지 폴라티셔츠는 오늘 이후로 입지 못할 게 뻔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 너무 얄미웠다. 잠깐의 몸싸움이 힘겨웠는지 수진의 쌍꺼풀이 짙어지고 그새 눈가가 거뭇하게 변하고 있었다. 금세 지친 듯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정우가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웃지 마, 옷이나 물어내.”'“원하면 사줄게. 눈에 힘이나 풀어.” '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정우가 수진의 옷자락을 잡은 손을 풀더니 등을 감싸 안았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몸이 반 바퀴 돌려지고 두 사람의 위치가 쉽게 바뀌었다. 정우가 자신의 혀로 입술을 살며시 축이며 웃으며 말했다.'“키스하고 싶어.”' 처음 봤을 때는 자신의 머리카락 하나에도 손이 닿는 걸 싫어했으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식으로 키스하고 야한 말도 서슴없이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래로 내려뜬 눈 위로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단정하고 날카로운 얼굴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지금 어떤 표정인지 자각은 있어?”'“글쎄, 느끼하고 짐승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건가?”'“아니, 그렇지 않아. 뭐랄까……, 진짜 섹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