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페 아마데오
신촌 대학가를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카페 <아마데오>의 간판이 보인다.
대학생들의 무리를 헤치고 걸어온 영진이 막 카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킨 하경은 들어서는 손님을 맞을 준비에 바짝 긴장했다가 친구를 보고 살짝 긴장이 풀린 듯했다.
“어서 와.”
“할만 해?”
“어…….”
하경은 자신 없음을 감추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어선 키가 늘씬하니 큰데다가 피부가 맑고 단아한 인상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형이라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영진이 실내를 둘러보니 3개 정도의 테이블에 손님이 앉아 있다.
빈 테이블 앞에 털썩 앉는 영진의 맞은편에 하경이 주스를 가져와서 앉았다. 처음 해보는 장사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친구가 오니 그새 맘이 풀어져서 학창 시절처럼 마주 앉아 수다라도 떨고 싶은 거다.
그런 마음이 다 전해져 와 안쓰러우면서도 영진은 괜히 면박을 주었다.
“얘는! 나도 어엿한 손님이라구, 왜 네 맘대로 아무거나 가져와? 주문을 받아야지.”
“아, 미안. 뭐 줄까?”
“카푸치노.”
“어, 그래.”
아직은 이런 카페의 주인 노릇 하기가 어색한데, 그런 하경을 살짝 타박하는 영진의 말이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지, 난 이제 손님들 상대로 장사를 해야 하는 입장이지.’
커피 잔을 앞에 놓은 영진과 아까의 주스 잔을 자기 앞에 놓은 하경이 잠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침묵을 깨는 건 역시 영진이다.
“장사 잘되니?”
“이 정도면 먹고살 만할 거 같아.”
“이렇게 먹고살 걱정하느니 그냥 꾹 참고 눌러 살지 그랬어?”
하경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후회 안 해?”
정곡을 찌르는 아이.
언제나처럼 직선적이고 명쾌하다.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
“너무 일찍 결혼했던 걸 후회하는 거야? 아님 헤어진 걸 후회하는 거야?”
“영진아.”
“알아, 그만할게.”
답답해진다. 인생의 대사에서 한번 실패했다는 자격지심 탓인지 그 얘기만 나오면 속이 쓰리다. 둘도 없는 친구 영진의 그 직선적인 성격은 시원시원해서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마음을 찌르는 것이다.
화제를 돌려 보기로 했다.
“그림은 잘 돼 가니? 동문들끼리 모여서 작품전 한다며?”
“어, 너도 출품하지 그래.”
“내가 어떻게 해. 붓 놓은 지 꽤 되었는데…….”
“김 교수님은 아직도 너 아까워하셔. 다른 생각 말고 그림이나 열심히 그려.”
“아직…… 아직은 용기가 안 나.”
“위자료 왕창 받아서 프랑스 유학이나 가지 그랬어.”
또 그 이야기…….
안 듣고 싶지만 어차피 이혼한 이상 평생 들어야 할 레퍼토리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많이 받아서 가도 결국은 고생바가지일 텐데 뭐. 난 그럴 만큼의 재능도 없어. 그리고 이 정도면 그 사람 나한테 최선을 다한 거야. 이 카페 차리는 데만 해도…….”
하경으로서는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알아, 그 사람이 할 만큼 했다는 거. 그래도 넌 너무 아깝다.”
영진은 일단 수긍은 가지만 친구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이담에 그림 그리고 싶어지면……, 그때 열심히 그릴 거야.”
하경의 쓸쓸한 미소 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이 땅의 모든 인연 다 버리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지금 당장이야 위자료니 엄마에게 물려받은 재산이니 해서 넉넉하고 여유로울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걸 몽땅 들고 파리로 간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화가라는 직업은 사실 직업이라고 하기도 뭣한, 최소한 그 일을 해서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활동이 아니다. 호당 얼마씩 받는 그런 유명 화가가 된다는 건 얼마나 아득한 일이던가. 세상엔 수많은 미술 대학이 있고 수많은 재능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피어나고 있다.
아니 미대를 가지 못한 천재들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들과 경쟁하면서 내 그림을 팔기 위해 아등바등한다는 건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경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지, 그림을 파는 일에 몰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먼 곳에 가서 실컷 그림을 그리는 것은 몇 년 뿐일 테고 그다음부터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아야 하고 그렇다면 비참해질 것이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