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푸른 휘장을 두른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라엘의 몸은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 혈도를 쥔 그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말고삐를 단단하게 틀어쥔 그녀의 한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그러나 라엘의 눈에는 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불면의 밤, 그의 의식을 틀어쥔 아린의 모습만이 눈동자에 들어찼다. 라엘의 심장이 통제를 잃고 제멋대로 울렁거렸다. 마치 독한 술을 마신 듯 명치끝부터 뻐근한 감각이 밀려 올라왔다. 미친 듯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부분을 순식간에 훑었다.'‘무사했느냐!’'그러나 밀물처럼 밀려드는 안도감도 잠시, 라엘은 망연자실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하하, 하하하!”'그의 눈동자에 쓸쓸한 저녁노을이 일렁거렸다.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대기를 울렸다. 힘을 잃고 흔들리는 혈도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운탄과 디온은 그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었다.'“너, 너는…….”'어찌하여 아린이 검을 들고 왕의 앞에 대치하고 서 있는가. 그러나 라엘은 금국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해 버리고 말았다. 죽음보다 더한 증오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토록 원했었다. 그녀만은, 부디 그녀만은 아프게 하지 않기를…….'“원수 사왕! 내 칼을 받아라!”'아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운탄과 디온이 움찔 하며 앞으로 나섰지만 라엘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다. 마음이 서늘해져 버리고 말았다.'“내 나라를 빼앗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앗아간 원수 사왕을 내 손으로 처단하겠다!”'탑의 꼭대기에서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현왕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제 1왕자를 잃었지만 금국에는 아휀이 있다. 여자여, 사왕만 처치해라. 아니하면 이 전쟁은 의미가 없어진다. 모든 손실을 감수한 것이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살아오면서 가장 재미있는 여흥거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엇갈려 딱 소리를 내자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 연결된 듯 아린의 몸이 움직였다. 운명의 사슬이 이제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둘째 왕자 아휀의 능력이었다.'사람의 의식을 조종하는 최면…… 모든 감정을 일시에 지워 버리고 가장 악랄한 감정인 증오만을 남겨 뿌리내리게 한 것, 그것이 바로 아휀이 아린에게 내린 주술이고 최면이었다. 그에 따라 아린은 지금 라엘을 사랑하는 남자가 아닌 죽여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흑주술이 응집된 증오의 세레나데는 그렇게 아린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자, 어떠냐!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사왕 라엘, 너라면 이 정도쯤은 눈치 챘겠지? 그렇다면 또 어쩌겠느냐? 살기 위해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베겠느냐? 아니면 대신 죽어 주겠느냐? 어디 한 번 네 판단을 지켜볼까?”'현왕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순간 하늘로 치켜 올라간 아린의 검이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혔다. 꽃망울보다 붉은 핏방울이 흩날리는 순간 운탄과 디온이 분노의 포효를 날리며 라엘의 주위를 둘러쌌다. 설마 그녀가 왕을 베겠는가! 그리고 설마 왕이 그 검을 허무하게 받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아린의 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라엘의 허리를 그리고 지나갔다. 라엘은 피하지도, 맞서지도 않았다.'챙그랑!'혈도가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라엘은 신음을 흘리며 베어진 허리를 감싸 쥐었다.'“멈추어라!”'운탄이 분노로 번뜩이는 눈으로 아린을 노려보며 달려 나갔다. 순간 라엘의 고함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운탄! 검을 내려라!”'“그럴 수는 없습니다!”'악을 담아 외치는 운탄의 검은 눈동자가 젖어 올랐다. 어찌하여 운명의 악신은 이리도 한 곳으로 집중하여 그 추악한 감정을 쏟아내는가.'“그만두시오!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마시오. 만약 그녀를 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오!”'불처럼 토로하는 그의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아린의 눈동자에 섬광이 일더니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날카로운 칼끝이 라엘의 심장을 정확하게 조준했다.'“사왕, 칼을 들어라! 어찌하여 맞서지 않는 것이냐!”'아린은 소리치며 칼끝에 힘을 실었다. 바람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그녀가 쥔 검이 라엘의 심장을 향했다.'“나는 네 심장 그 밑바닥까지 편해지길 바란다. 내 피와 맞바꿀 수 있다면 그리하겠다.”'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상황, 곳곳에서 피가 튀고 살이 떨어져 나가는 그 살육의 현장에서 라엘은 마지막을 택했다.'‘이미 힘들어진 것은 오래된 일이다. 차라리 내가 없으면 네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결정한 것도 오래된 일이다. 단약의 저주는 내 생명의 기운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것을 깨달은 지도 오래 되었다. 그러나 함께 있어도 괴로워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몇 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너를 내 팔 안에 안고서 잠들고 싶었다. 그것이 남자로서의 욕심이라면 차라리 욕을 먹어도 좋으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라엘의 눈동자가 서서히 편해졌다.'‘너를 사랑한다.’'라엘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그의 아련한 눈동자와 아린의 시선이 부딪혔다. 달려오던 아린의 검이 주춤했다. 흔들린 칼날이 라엘의 심장을 비껴 지나갔다. 팔을 베고 지나간 칼을 고쳐 잡은 아린은 이를 악물고 다시금 몸을 돌렸다. 아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또다시 라엘의 심장을 향해 예리한 직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