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각양의 삶

검은 졸업식 가운을 입은 성연은 한 손에는 학사모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노크했다. ‘네.’라는 목소리가 들리자 성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셔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성연의 눈에 검은 안경이 보였다.

“어머, 성연아! 어서 와!”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쌍꺼풀이 진한 큰 눈이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신지영 조교수님… 이명준 교수님을 너무나 잘 보좌하고 있는 성연의 선배이자 조교수인 지영은 늘 그렇듯 성연을 반겨 주고 있었다.

“교수님, 이 교수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성연의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지영은 앉으라고 손짓으로 권하며 커피 내올 준비를 했다.

“글쎄, 오늘따라 왜 이리 늦으실까? 우리 성연이 졸업식 날인데 일찍 오셔서 같이 사진도 찍고 해주심 좀 좋아?”

지영이 성연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얘기하며, 커피를 내왔다. 뜨거운 커피를 두 손으로 받아 들며 성연은 마주 앉는 지영에게 웃어 보였다.

“늘 바쁘시니까요. 그럼 신 교수님, 저랑 사진 한 장 찍어 주실 수 있으세요? 친구들하고 몇 컷 찍고 나니까 더 이상 찍을 사람이 없네요.”

지영은 순간 가슴이 짠했다. 고 3때 부모님과 남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홀로 된 성연이… 대학 입시를 치르고 K대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기뻐할 틈도 없이 장례를 치르느라 입학을 하지 못했었다. 하루아침에 온 가족을 잃은 성연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학교는커녕 하루하루 밥벌이 하느라 알바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 이명준 교수를 만났다.

이명준 교수를 통해 알게 된 이름 없는 후원자가 성연에게 나타났었다. 성연은 후원자의 도움으로 이 학교 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때 후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이명준 교수는 그의 모든 후원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원자는 자신을 알릴 만한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은 채 이 교수 뒤에 꽁꽁 숨어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4년을 물어도 이 교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후원자가 알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신 교수님, 교수님은 정말 모르세요?”

함께 사진 두어 장을 찍은 뒤에 성연이 지영에게 물었다. 그의 은인에 대해…. 그러나 지영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성연아. 너무 알려고 노력하지 않음 안 될까? 이 교수님께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씀하지 않으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걸 거야. 언젠가는 그분의 마음이 바뀌어서 네 앞에 짠, 하고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그때까지 열심히 살아, 행복하게…. 그게 그분이 가장 바라시는 거라고 이 교수님 늘 말씀하셨잖아.”

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성공하는 길, 내가 행복하게 잘 지내는 길, 그것이 그분의 바람이라고… 4년간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성연은 이 행복을 정말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늘 그게 궁금했다. 보이지 않는 그분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든든하고 감사하지만, 정말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늘 미안했다.

“이제 기숙사 나가면 정말 혼자 지내야겠네?”

“네…. 후원자님께서 원룸을 마련해 주셨어요. 이 교수님 선물로 주신 피아노가 들어갈 만한 공간도 있고… 저에게는 정말 과분한 집이에요. 다행히 레슨 자리가 생겼으니까 이제부터는 혼자의 힘으로 독립할 거예요. 물론 레슨 자리도 교수님이 도움을 주셨긴 하지만….”

용감하게 대답을 하다가도 마지막에 쓴웃음을 짓는 성연에게 지영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잘 할 거야, 박성연! 이 교수님의 수제자잖아? 네 밑에서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될 거라는 꿈을 가지길 바라!”

“감사해요, 교수님….”

성연은 한동안 신 교수의 따스한 미소를 바라보며 큰 위로와 용기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내딛을 발걸음에 힘을 더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

재훈은 가게 문을 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으므로 우산을 어깨에 대충 걸치고서야 셔터문을 올릴 수 있었다. 늘 그래 왔듯이 재훈은 앞치마부터 둘렀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 있게 씩 웃어 보았다.

비가 와서 어제처럼 햇빛이 비치진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비가 오는 날엔 어묵 국물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다. 우산 통을 미리 내다 놓아야겠다.

“이 씨! 벌써 나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