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술 좀 적당히 마시라고, 담배 좀 작작 피우라고, 자느라 약속 시간에 늦지 좀 말라고, 기분 좋다고 한턱내고, 기분 나쁘다고 한턱내고, 돈 좀 헤프게 쓰지 말라고, 여자 친구에게 너무 목매지 말라고…….'“야, 이수랑! 또 멍 때리냐?”'내 머리를 툭 미는 해성의 기다란 검지가 그의 바람막이 점퍼 주머니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분명 6시 30분까지 만나기로 해놓고 7시 7분에 나타난 주제에 뭘 잘했다고 삐딱한 말투에 손찌검까지!'“나 급하게 나오느라 담배도 못 사왔어. 여기 있어.”'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해성은 껄렁껄렁한 걸음걸이로 길 건너의 편의점에 가기 위해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183센티에 달하는 키와 아무 옷이나 걸쳐도 맵시가 나는 넓은 어깨, 부스스하게 만져놓은, 조금은 억센 머리칼과 늘 인상을 쓰고 있다가 어느 순간 웃어 버리면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매력 있는 얼굴.'담배를 사서 나온 해성은 담배의 비닐 포장지를 벗겨 편의점 앞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다른 건 몰라도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법은 절대 없다. 담배 케이스를 거꾸로 들어 자신의 왼손바닥에 두, 세 번 툭툭 치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 필터를 후, 분다. 담배를 입에 문 후 바람을 막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이고 크고 기다란 손으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내내 찌푸린 인상은 풀지 않는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무단횡단을 하는 주제에 달리는 차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나를 향해 걷고 있다. 저러다 덤프트럭에 확 치어 버리지!'“가자.”'아직은 바람이 찬데 그런 곳에서 40여 분 이상을 가만히 있었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재채기가 연거푸 쏟아져 나왔다. 감기에 걸리는 건 생각만 해도 지독한데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열이 살짝 오르려는 게 조짐이 좋지 않다.'“감기 걸리면 약값 네가 다 내!”'“내가 약속 시간에 30분은 기본으로 늦는 거 빤히 알면서 먼저 나온 네가 잘못이지. 괜히 일찍 나와서 지랄이야.”'담배를 든 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쥔 해성이 내 머리를 한 대 때린다. 머리를 맞은 것보다 담배 연기가 갑자기 나를 향하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며 기침을 해대자 해성이 안 그래도 더러운 인상을 더욱 구기며 반대쪽 손으로 내 양 볼을 꼭 쥐고 면전에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야, 강해성!”'“바보. 하여튼 이수랑 멍청한 건 세상이 다 알지. 그러게 까불긴 왜 까불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시작된 지독한 인연이 13년째 지속되는 지금 나와 해성인 서로에 대해서 소소한 것까지 전부 알고 있는 스스럼없는 친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금씩 그 관계가 깨지고 나는 1년째 해성이를 혼자 좋아하고 있다.'해성이를 혼자 좋아한다는 걸 생각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일기장에도 적지 못하고 가슴앓이만 죽어라 해대지만 해결책은 없다. 그저 이 멍청한 놈이 나처럼 우연찮게 갑자기 내 매력을 알아줘서 나만의 로맨티스트가 돼 주길 바라는 꿈을 꿀 뿐이다. '방금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웠으면서 마치 그걸 까먹기라도 한 듯 해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새 담배를 다시 꺼내려 하는 순간 그의 휴대폰 벨소리가 내 귓전을 울린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해성의 그녀 지정벨 ‘욕심쟁이’.'“어! 어디야?”'부드럽다. 나도 모르게 ‘네 옆에 있어.’라고 대답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하다. 이중인격자.'“응. 아니, 친구 만나고 있어. 무슨! 내 친구 중에 여자가 어디 있어!”'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고 뭐니?'“응. 응. 나도 보고 싶지. 그럼. 응. 언제 와? 응. 알았어. 또 전화해. 응. 응.”'여자 친구와 통화를 할 때조차도 담배를 입에 물지 않는 해성인 전화를 끊기 무섭게 인상을 찌푸리고 담배를 입에 문다. 콱 폐암이나 걸려라!'“나는 남자냐?”'뜬금없는 내 질문에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내뿜던 해성이 아니꼬운 시선으로 나를 깔본다. 그의 키가 더 크니까 당연히 나를 내려다보는 게 맞지만 정말 기분 나쁘다. 키 때문에 평생 혼자 살게 되더라도 내 키가 2미터쯤 되면 좋았을 걸.'“뭔 개소리냐. 오늘 이수랑 왜 이렇게 까칠해? 그날도 아니잖아.”'여자 친구한테는 그렇게 고분고분하고 ‘뭐뭐냐’ 같은 말투는 꿈에도 못 꾸면서 나와는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불만이나 투정을 툭툭 내뱉는 것 같다. 어차피 혼자 짝사랑하는 주제에 기대도 안 하지만 섭섭하고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쩌자고 이런 놈을 좋아하기 시작했을까. '사실 별것도 아닌 사건이었다. 나랑 해성이한텐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 사건이 일어난 당일 그 일을 까먹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사건이었다. '그저 내가 6개월 정도 사귀었던 남자가 바람둥이였을 뿐이었다. 그것도 내가 세컨드. 뻔뻔하게 그래도 자기를 만나겠냐고 묻는 그 남자의 뺨을 한 대 갈겨 주지는 못할망정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는데 우연히 그 공원을 지나가던 해성이가 나를 봤다. 그 남자가 자신에게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음을 자랑하듯 해성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해성이 그 남자를 향해 꽤 무서운 말을 내뱉었고, 울다가 눈에 뭐가 들어간 듯싶더니 그게 콩깍지였다. 하필이면 왜 강해성한테. '서로의 일에 흥분하는 것쯤이야 우리한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실컷 쥐어 패놓고선 ‘네가 잘한 것 같으면 고소해!’라고 소리치곤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걷는 해성의 등이 너무 듬직해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남자의 세컨드였다는 것도 잊은 채 맞잡은 해성이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울고 또 울었다.'“야! 멍 좀 그만 때리라고!”'해성이의 엄지와 검지가 내 볼을 세게 잡아당기자 짜증보다 눈물이 솟구친다. 이제 해성일 그만 만나야 하는 걸까.'“너 무슨 일 있냐?”'우리가 자주 가는 동네 주점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해성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묻는다. '“아무 일도 없어서 그런다, 왜!”'“아무 일도 없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다고! 이게 아주 배가 불렀어!”'“야, 강해성.”'“왜?”'해성이 내 잔과 자신의 잔에 맥주를 따르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때 시선을 내리깐 해성의 얼굴은 내 심장이 터질 듯 뛰게 만든다. 얘, 속눈썹이 긴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길었나?'“넌 나 왜 만나?”'“뭔 소리야. 심심하니까 만나지 뭘 왜 만나. 내가 널 이유 있어서 만나야 되냐?”'“나 연애하게 어디서 남자 좀 구해 줘.”'작년에 그 남자에게 덴 후론 좀처럼 연애를 하지 않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낸 탓인지 해성이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저런 표정을 보자 입술을 확 덮쳐 버릴까 싶은 생각도 든다. 멍청한 표정.'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고 아주 잠깐 가볍게 미소를 지었던 해성이 다시 티꺼운 표정으로 바꾸고 말을 툭툭 내뱉는다.'“이제야 좀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냐?”'언제나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왔고 제대로 살아왔다. 얘 눈에는 내가 어떤 식으로 비치는 걸까. '요즘 해성일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다. 화내고 싶다.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해성에게 갖은 욕을 먹는 화가 아닌, ‘날 그렇게 걱정해 주다니 고마운데’라는 인사를 들을 수 있는 화를 내고 싶다.'“마시자! 오늘 나 먹고 죽는다!”'“간만에 이수랑 취한 꼴 보겠네!”'진짜 내가 취한다면 정말 오랜만이다. 전에는 둘이서 집도 못 찾아갈 정도로 퍼마시곤 했는데 지금 여자 친구가 생긴 뒤로 해성인 나하곤 절대 과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다. 여자 친구에겐 그냥 친구를 만난다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절대 행실을 쉽게 하지 않는 거다. 게다가 둘이 한참 흥에 겨워 마시려는 찰나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나를 덩그러니 혼자 남겨 두고 가 버리곤 했으니까 취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 남겨지더라도 취할 거다. '“엊그제는 애들이랑 농구 하고 있는데 과일이랑 음료수를 갖고 온 거야. 음료수만 사와도 예뻐 죽을 텐데 집에서 과일 예쁘게 깎아서 찬합 통에 담아 오는데 안 예쁘겠냐고. 너도 그런 건 좀 배워.”'“나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 정도는 할 줄 알아.”'“내가 너를 모르냐? 네가 퍽이나 그런 걸 하겠다!”'내가 인상을 쓰고 해성일 흘겨보자 해성이 한쪽 눈을 찌그러뜨리며 ‘스읍’ 하는 소리를 내더니 주먹으로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다. '“어디 오라버니를! 눈 깔아!”'“야, 강해성.”'“왜?”'아직 안 취했다. 하지만 취해서 얘기하고 싶진 않으니까.'“넌 나랑 평생 친구 할 거야?”'“아니. 내일 모레까지만 할 거야.”'썰렁하다. 하지만 그런 농담까지도 저놈의 유머러스함이 좋다고 할 정도니 내게 정말 제대로 콩깍지가 씌었나 보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