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갑자기 진실을 들이대니 양심의 가책은 느끼나 보지?”

“난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몰라? 정말? 하, 저 모습을 재하 오빠가 꼭 봤어야 하는데! 자신은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너처럼 두 얼굴을 가진 여자는 처음 봐. 사람들 앞에선 준하 오빠만 보이는 양 행동하면서 뒤에선 재하 오빠 마음이나 흔들어 놓은 주제에 아무 죄도 없는 양 순진한 표정이라니. 그래서 난 옛날부터 네가 싫었어. 아무 자격도 없는 주제에 당연한 듯 모든 걸 가져가 버리는 네가 끔찍하게 싫었다고!”

해인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있었다.

설마 유라가 그날 밤의 일을 아는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녀가 아는 재하라면 그런 사적인 일을 남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만큼 무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이유로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유라가 말하듯 의도적으로 재하에게 꼬리친 적은 없다 해도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준하를 돌보는 동안에도 이미 재하를 남자로 의식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가 미처 바라보지 못한, 스스로도 인식 못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돌연 유라가 테이블을 쾅 내리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해인은 자동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 테니 잘 들어. 또 무슨 수로 재하 오빠의 마음을 홀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절대 네 생각대로 안 될 거야. 왜냐하면 바로 내가 옆에서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지켜볼 테니까! 또다시 재하 오빠를 상처 입힌다면 그땐 내가 가만있지 않겠다는 소리야.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네 발로 걸어 나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

쾅! 몸이 펄쩍 뛸 만큼 거실이 떠나가라 세찬 현관 문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나, 놀래라. 아주 문이 나가떨어지겠네.”

언제 나왔는지 해인 옆으로 바싹 다가온 정 씨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현관 쪽에 이어 창백한 안색의 해인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괜찮아요, 아가씨?”

“네? 아, 그럼요. 끄떡없어요.”

해인은 정말 괜찮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떡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정 씨의 표정은 여전히 걱정 한가득, 연민에 차 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아가씨도 유라 아가씨 성격이 어떻다는 거 다 알고 있잖아요. 말은 저렇게 심하게 해도 악의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여기 있는 아가씨 보고 깜짝 놀라 질투 나서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고 기분 상했어도 마음 풀어요.”

혹시나 유라로 인해 해인이 상처 입었을까 싶어 나름 위로하려는 정 씨였다.

해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안다, 이 마음 착한 여인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그리고 유라가 흥분한 이유 역시 잘 알았다. 그 모두가 재하로 인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역시.

“커피가 다 식었을 텐데 뜨거운 것으로 새로 가져다줄까요?”

“아뇨, 다 마셨어요. 괜찮으면 그만 방에 들어가 좀 쉬려고요.”

“그럴래요? 또 아픈 건 아니어야 할 텐데.”

“아프긴요. 이미 다 나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시다가 주름 생기세요.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해인은 정 씨의 손을 꼭 잡으며 애써 얼굴 한가득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나이 든 여인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아가씨?”

정 씨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해인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 늙은이 바람이 있다면…… 이제 두 분 얼굴에서 웃음을 보는 거네요.”

“…….”

“예전에 준하 도련님 살아 계실 때처럼 환하게 웃는 아가씨를 보고 싶어요. 재하 도련님도 좀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고. 아마 준하 도련님도 저 위에서 그런 것을 바라고 계시지 않을지, 이젠 그만 아파하고 떠난 사람은 보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에구머니나, 나이가 드니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어져 가지고, 그냥 못 들은 셈 치세요,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