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0월 마지막 주. S 초등학교 축제가 열렸다. 초등학교 축제인데 볼 것이 뭐가 있냐 하겠지만 3년마다 열리는 S 초등학교 축제는 지역 뉴스의 한 꼭지를 차지할 만큼 대전 지역에선 제법 유명한 행사였다. 프로 연출가의 지도를 받는 연극이나 음대 교수의 지휘 하에 연주되는 오케스트라도 볼만했지만 S 초교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거대한 도미노 게임이었다. 체육관 바닥에 밑그림을 그리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릴 만큼 거대한 도미노는 축제의 마지막 순간에 전교생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됐다.

쫘라라락! 마치 붓 칠을 하듯 블록이 쓰러지며 차곡차곡 체육관 바닥에 그림과 글자가 새겨지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탄성을 지르며 도미노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후인은 문득 허탈해졌다. 블록을 쌓은 것은 3일이지만 도안을 고르고 조를 짜고, 체육관 바닥에 밑그림을 그리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는데 쓰러지는 건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무너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구나, 후인은 이런 생각을 했었다.

후인이 무너진 도미노를 다시 떠올린 건 열아홉 살, 유독 눈이 일찍 내린 날이었다.

남자 친구와 뮤지컬을 보러 가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빠였다. 발신자를 확인한 후인은 휴대전화를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공연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데다가 받으나 마나 언제 들어올 거냐는 재촉 전화일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공연을 보는 내내 그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고 있는데도 집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지만 어떤 예감에서였을까.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차상호 씨 따님 맞습니까?”

“예. 무슨 일이시죠?”

“여긴 노원구 경찰서입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상계동 H 병원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낯선 목소리는 이 말만 남긴 채 수화기 뒤편으로 사라졌다. 후인은 어떻게 병원에 도착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를 만나고 누가 자신을 데려다줬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하얀 시트를 뒤집어쓴 상호 앞에 서 있었다.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과 비슷했다. 만으로 열아홉 살. 제 손으로 공과금 한번 내본 적 없던 그녀가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는 것,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것, 한 달 이내에 집을 비워 줘야 한다는 것, 부모님 이름 앞으로 된 재산은 손수건 하나까지도 법원이 관리를 하게 됐다는 것 정도였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후인은 당장 이사할 준비를 했다. 급한 대로 방 하나와 부엌, 욕실이 딸린 월세방을 구했다. 보증금 200이 없어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방을 구하고 이사를 하자마자 후인은 일자리를 구했다. 레스토랑에서 설거지를 비롯한 잡다한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다. 시급이 높은 만큼 일은 힘들었다. 일이 끝날 때쯤이면 다리며 손이며 퉁퉁 부어 신발에 발이 꽉 낄 정도였다. 일이 끝난 첫날, 후인은 볕이 들지 않아 항상 곰팡내가 떠도는 월세방에 들어서며 자신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 나가고 있을 때 두 번째 블록이 넘어졌다.

엄마 송연이 약을 삼켰다. 상호가 죽은 후 다 녹아 버린 양초처럼 끝없이 잠만 자던 송연이었다. 조금만 발견이 늦었다면 후인은 아빠의 장례식을 치른 지 두 달도 안 돼서 두 번째 장례를 치르게 됐을 것이다.

구급차 안에서 후인은 아빠의 장례식에서도 흘리지 않은 눈물을 마구 쏟아 냈다. 살면서 그 순간만큼 겁이 난 적이 없었다. 엄마마저 잃게 될까 봐 너무도 무서웠다. 송연을 응급실에 뉘여 놓고 후인은 놀란 마음을 다독일 틈도 없이 바로 일터로 향했다. 생활비도 간당간당한 판국에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였다.

12월이 되자 후인이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출장 서비스를 시작했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음식을 배달에서 세팅까지 해주는 서비스였다. 크리스마스이브, 대목 중에 대목답게 후인은 새벽부터 허리 한번 펼 틈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 매니저가 실버를 정리하는 후인에게 말했다.

“후인 씨, 보조 테이블 쪽에 잔이 부족한 것 같은데. 괜찮으면 주차장에 가서 가져다줄래요? 한 다스만.”

“네. 차문 열려 있나요?”

“열려 있긴 할 텐데 혹시 모르니 열쇠 가져가요. 혼자 들고 올 수 있겠어요?”

“그럼요.”

야무지게 대답한 후인은 차 열쇠를 받아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상자를 두 손에 받쳐 그녀가 막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 할 때였다.

“차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