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 춤 연습을 끝내고 연습실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쉬고 있던 나무는 휴대전화가 진동하자 공처럼 떼구르르 굴러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 '현욱이었다. 그는 옥상에서 내려오자마자 투자자들과 술자리가 있다며 바로 퇴근했었다. '“연습실. 넌 술 잘 마시고 있어?”'-현수는?'“딴소리는. 먼저 갔어.”'-의리 없이 혼자? 녀석, 만날 혼자 먼저 가?'“아니. 늘 같이 갔는데 오늘은 개인연습 끝내더니 일 있다고 가더라. 되게 미안해하는 눈치긴 한데 얼굴이 활짝 핀 게 또 박민주 만나러 간 모양이야! 닭붕어가 세트가 된 거지. 못 말리는 닭붕어들!”'-너도 그만하고 들어가. 연습 기간만 아직 5주 가까이 남았어. 목 관리, 체력 안배 잘해. 연습 때 무식하게 달리다가 공연 펑크 내지 말고.'“잔소리 할 거면 끊어. 정 감독만으로 충분해. 정현욱한테까지 잔소리, 사양이야.”'-잔소리가 아니고…….'나무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를 빠득빠득 갈며 길길이 날뛸 것은 알지만 연출자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남자친구한테까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그녀는 스트레칭을 하며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녀가 맡은 호은은 다른 역할에 비해 유난히 독무가 많았다. 노래는 90%쯤은 자신 있는데 안무는 아직 미흡한 점이 많았다. 같이 연습을 시작했는데도 그녀보다 훨씬 훌륭하게 안무와 노래를 소화해내는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잠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연습을 하고 나자 숨이 차오르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떨어져 마룻바닥을 물들였다. 그녀의 노력을 머금고 떨어진 땀방울들이 남긴 흔적들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쾌감이 머리끝으로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나무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생수로 목을 축이고 다시 춤을 시작하려던 나무는 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누나! 아직 안 갔어?”'우진이었다. 우진은 문 앞에 서서 오래도록 망설이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다. 현욱이 그를 상대로 도발한 이후로 나무와 그사이에 다가갈 수 없는 투명한 벽이 드리워진 느낌이었다. '현욱과 나무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다. 현욱이 선전포고를 했다고 해서 나무가 바로 그의 여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우진 또한 순순히 물러날 마음도 없는데 하루 종일 나무에게 둘러쳐진 경계선 안으로 손을 뻗는 것이 두려웠다. 우습지만 그랬다. 그렇게 서성이다가 정말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그제야 그 벽을 뚫고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어, 우진아! 너도 아직 안 갔구나.”'나무는 오늘은 그를 처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대본 리딩하는 내내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음. 현수는 안 보이네. 누나 혼자야?”'“음.”'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데 그가 그녀에게 키스했던 순간이 떠올랐다.'‘내 맘이다, 누나. 잊지 마. 절대.’'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다고 늘 말했지만 그 말에 강경함을 실어 말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스페어타이어처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다가오는 그를 거부하긴 했지만 적당한 거리 이상으로 멀어지진 못하게 방어를 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우진에게 한없이 미안했다.'“우진아.”'“뭐 하고 있었어?”'그의 물음에 그녀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뽀얀 피부에 맑은 미소. 미소년 같은 그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마비시키는 힘이 있었다. '“어느 파트 연습하고 있었어?”'“1막 45씬.”'“나도 그 부분 잘 안 되는데 같이 해 볼래?”'“어?”'우진에게 현욱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려 했다. 이젠 그녀처럼 못생긴 해를 바라보는 눈부신 해바라기는 그만하라고 말해 주는 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서 시작해.”'우진이 마법의 꽃가루 같은 미소를 머금고 박수를 쳐 박자를 맞추었다. 그녀는 마법의 가루에 취해 저절로 발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막 45씬은 6명의 주인공들이 모두 참석하는 파티 씬으로 그녀가 독창을 하면 다른 5명의 주인공들과 앙상블들이 받아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노래에 맞춰 우진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진은 늘 이런 순간을 꿈꾸었다. 그녀의 숨결을 온전히 소유한 채, 함께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다가 서로를 바라보는 은은한 눈길에서 불꽃을 튀기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로 다가가 키스하는 낭만적인 장면! 언젠간 그런 순간이 올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포기하지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지도 않을 것이었다.'“아앗!”'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땀과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나무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그는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며 비명을 지르자 놀라 다가갔다. '“누나, 괜찮아?”'“어. 괜찮아.”'접질린 발목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일어나려 했다.'“아앗.”'그러나 생각보다 통증이 심해 다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다리 펴고 그냥 앉아 있어. 얼음찜질부터 해야겠다. 사무실 냉장고에 얼음 있을 거야.”'우진은 그녀의 발목을 살펴 본 후 일어났다. 침을 맞으면 좋겠지만 이 시간에 문을 연 한의원은 없을 것이었다. 심한 것이 아니면 얼음찜질 정도로 가라앉을 것이다. '“아니야. 괜찮아.”'“그냥 두면 많이 부어. 내일 연습 못할 수도 있어. 조금만 기다려.”'우진은 그대로 연습실을 나가 얼음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얼음주머니가 없어 아쉬운 대로 손수건에 얼음을 넣어 얼음찜질을 해 주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길과 체온이 그대로 실린 따뜻한 손길로 그녀를 돌봐주고 있는 우진을 보고 있자니 고마우면서도 한편 미안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고마운 건 접수. 미안하단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미안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잠시 멍했지만 이내 지각의 촉수가 가동했다. 그를 사랑할 수 없어 미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우진아.”'“집에 가서 얼음찜질 한 번 더 하고 자.”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따뜻한 봄바람 같은 남자. 같이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웃을 일이 많아지는 이 아이를 왜 진작 사랑하지 못했을까, 자학이 불쑥 끼어들자 나무는 스스로가 너무 어이없어 웃어 버렸다. '현욱을 얻지 못했을 땐 오로지 현욱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니 슬슬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부른 돼지가 제 배 밑에 음식을 깔고 앉아 뭐 먹을 거 없나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현욱이 이런 걸 알았다간 너 죽고 나 살자고 덤빌 게 뻔했다. '“우진아. 나 현욱이랑…….”'“누나!”'그녀의 입에서 현욱의 이름이 거론되자 그는 무조건반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심장이 반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심장이 더 빨리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우진아.”'그녀의 눈빛에 난감함이 어렸다. 반드시 말해야 할 무엇을 품은 난감한 눈빛. 그의 절망은 퇴적암처럼 높이를 쌓아갔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좋겠는데.”'“나, 너 속이고 싶지 않아.”'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넓은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절망감. 살면서 이렇게 좌절해 본 적은 없었다. 스스로가 이렇게 초라했던 적도 없었다. '“알았어. 누나는 나 안 속였어. 그럼 됐지?”'그가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맑고 아름답기만 하던 그의 미소가 가시가 되어 그녀를 찔렀다. 사랑하지 못한 것이 미안한 일은 아닌데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일어나 봐.”'그녀는 그의 팔에 의지해 천천히 일어났다. '“아앗”'한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는 발목의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인 모양이었다.'“안 되겠다. 업혀.”'“괜찮아. 그 정도는 아니야!”'그가 등을 돌리고 섰고 그녀는 가볍게 그를 밀어내고 걸었다.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발목에서 시작된 통증이 머리끝까지 뻗어 올라왔지만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입술을 빠득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그대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우진아. 내려 줘.”'놀란 그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은 채 말했다.'“내려 주고 나면 키스할 거야. 이대로 그냥 갈까? 아님 내려 줄까?”'그의 눈빛이 사자처럼 이글거리며 달려들었다. 위협적이고 강압적인 눈빛,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키스하는 거 싫지? 그러니까 그냥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