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남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괜찮아요?”

새벽, 화장실에 대고 헛구역질을 하는 내 등을 토닥이며 김민석이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아마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김민석은 손바닥으로 내 등을 따듯하게 어루만졌다. 손바닥의 은은한 온기가 내 등과 함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급할 게 없다는 듯, 천천히 날 다독였다. 나는 그 손길에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의도치 않게 지난날의 이재한을 떠올렸다. 그 여름날의 이재한의 손길은 조금 서툴렀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새파랗게 질렸을 수도, 어쩌면 그 놀란 마음을 숨기려고 박민지와 유현에게 화를 낸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그때 나는 너를 어마어마한 보호자처럼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때 우리는 겨우 열일곱이었다.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세면대 물로 입을 헹구며, 몇 시간 전 내가 뱉은 말을 곱씹어 봤다. 그 순간 잔잔하게 불어오던 미적지근한 바람, 맥주 캔 표면에 몽글몽글 맺힌 물방울의 기분 나쁜 감촉, 혀끝을 붙잡고 미끄러지던 맥주의 무거운 뒷맛…, 다시 한 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변기 위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다. 내 머리를 들어 올려주고, 내 등을 토닥여주는 김민석을 뒤에 두고, 나는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명치 부근에서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뱉어내고 말 것이다.

“병원 갈까?”

두 번째로 입을 헹궜을 때, 김민석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병원을 갈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곧 괜찮아 질 거니까. 고개를 돌려, 화장실에서 일직선으로 보이는 현관문을 가만히 보았다. 이재한이 넘지 못했던 신발장, 덤덤한 회색빛의 현관문.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속 안 좋아지면 바로 말해줘요. 몇 시가 됐든 업고 갈 거니까.”

노란 스탠드 불빛만 은은하게 빛나는 거실에서, 갑작스런 급체에 기력을 소진한 나는, 김민석의 품에 안겨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감싸 안은 내 팔뚝을 가볍게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다정했다. 나는 김민석의 품에서 노곤하게 잠이 들며 홀로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더라.

* *

“헤어졌어.”

“또?”

열여덟, 여름방학이 끝난 직후였다. 박민지는 마치 전날 저녁 엄마에게 꾸중 들은 것을 불평하는 듯 한 논조로 자신의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의 이별은 마치 일상처럼 덤덤했고, 그것은 가방을 싸며 이야기를 듣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엉. 그 개새끼가….”

“개새끼 들어오신다.”

박민지가 헤어진 이유를 설명할 때 즈음, 스스로를 개새끼라 지칭한 유현이 교실 앞문으로 들어왔다.

“…….”

“…….”

그리고 침묵. 나는 더 이상 열일곱의 내가 아니었다. 이 둘의 불편한 사이가 불편하지 않았다.

“뭐.”

복어처럼 성이 난 박민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퉁명스럽게 뱉었고,

“나 먼저 갈까?”

나는 센스를 발휘하기로 했다. 내 말에 유현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싸가지 없는 시키… 퉁명스런 표정에 나도 모르게 울컥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커플 싸움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빨빨거리는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아니라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는, 대부분의 학교가 야간 자율 학습을 의무적으로 시켰다. 우리 학교는 2학년 때부터 야간 자율학습을 의무적으로 하게 하였는데, 전교에서 50등 안에 드는 학생들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주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49등이나 45등쯤을 하는 학생이었고, 이재한은 무던하게 20등 언저리를 차지했다. 공부를 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는 않았던 성적 덕분에 우리는 반이 달랐음에도 같은 공간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할 수 있었다.

“왔어?”

먼저 자리에 앉아있던 이재한이 날 보지도 않고 제 옆의 짐을 치웠다.

“둘이 또 헤어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