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 깔끔한 복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새로 지었다더니 정말 깨끗하다.”'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외부 소음이나 층간소음이 적절하게 컨트롤되는 빌딩이었다. ‘ㄷ’자 형태로 설계돼 복도에 두 집의 대문만 나란히 이웃해 있어 번잡하지도 않았다. '여타의 오피스텔처럼 사무적이고 딱딱한 이미지가 아니면서도 도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모든 조건을 갖춘 최신식 오피스텔은 윤의 마음에 꼭 들었다. 어지간한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세대주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는 관리실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도 윤의 호감을 상승시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작은 평수가 없어 혼자 살기엔 넓은 평수를 차지했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뭐, 어차피 전세니까.'에드워드 ―그녀의 애완거북이― 가 고이 엎드려 있는 플라스틱 투명 수조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현관에 들어서자 곧장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층이라 거실 창을 통해 전망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렸다. 이제 이곳이 그녀의 집이다. 공인중개사와 함께 집 구경을 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윤은 새삼스런 감동에 가슴이 벅찼다. 윤은 가슴속으로 부모님을 불렀다. '아버지, 엄마. 여기가 내 집이에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윤은 스물네 살 되도록 고모인 현숙의 집에서 살아야 했다. '핏줄이라 해서 모두 애틋한 것은 아니라, 교통사고로 부모님과 남동생을 한날한시에 잃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 주지 않았던 싸늘한 사람이 바로 현숙이었다. 자유로운 사고로 자식을 키우던 아버지와는 너무 다른, 규율을 강요하며 자유를 억압하고 체벌을 하던 현숙은 윤이 상대하기에 너무 힘든 사람이었다. 게다가 현숙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안 들어도 좋을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야 했던 그녀는 이 낯선 곳에서 홀가분함을 느꼈다.'짐 정리는 별게 없었다. 현숙의 집에서 가져온 것이라곤 침대와 책상이 전부였다. 부모님의 집에서 현숙의 집으로 가져가 지금껏 15년 가까이 써 낡을 대로 낡았지만 버리지 않고 새집으로 가져왔다. 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긴 유일한 것이기에 말이다.'에드워드의 집을 거실 한복판에 위치한 테이블에 내려놓은 윤은 창을 활짝 열었다. 이제 9월이지만 여전히 공기 중에 남은 여름 냄새가 창을 통해 전해졌다.'흥얼흥얼 콧노래도 모자라 신나게 음악을 틀고 댄스를 춰야 마땅했지만 자꾸 콧등이 시큰해졌다. 윤은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에 머리를 긁적거렸다.'“에드워드, 나 울보가 되어 버렸나 봐.”'현숙의 집에서는 우는 것이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완벽한 이성과 감정의 절제, 최소한의 행동을 강요받아야 했다. 현숙의 체벌을 피하기 위해서 가족을 잃은 열세 살 어린 소녀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집이다. 슬프면 크게 울고 기쁘면 크게 웃어도 되는 그녀만의 공간에서 참을 필요는 없었다.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은 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흐흑.”'눈물의 정확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목구멍을 치받고 뜨거운 것이 자꾸만 올라왔다. 혼자가 됐다. 11년 전 그때와 전혀 다른 의미로 혼자가 된 것이다. '“이윤, 정말 축하해.”'윤은 그렇게 한참을 울며 스스로에게 축하를 건넸다.''* * *'새집의 살림살이를 사고 인테리어 소품을 들이는 등, 나름의 바쁜 시간을 보내는 지난 5일 동안 굳게 닫힌 이웃집 현관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관리실에 슬쩍 물어보니 빈집은 아니라는데, 어쩜 이렇게 조용할 수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한참 집 안을 들었다 놓는 과격한 청소를 마친 윤은 거실바닥에 앉아 에드워드에게 먹이를 주었다.'“에드워드 너처럼 과묵한가 봐.”'그녀의 손바닥보다 큰 에드워드는 올해 일곱 살 난 거북이다. 하는 일이라곤 눈을 껌뻑껌뻑하고 입만 우물거릴 뿐인 에드워드는 정말 과묵했다.'동글동글한 돌멩이가 자작하게 잠길 만큼의 물만으로 서식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과 가리는 것 없는 잡식성 식욕은 에드워드를 수월하게 키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현숙의 집에서도 키울 수 있었던 유일한 애완동물이자 마음의 벗이었다.'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엄마의 심정이 되어 에드워드가 먹이를 먹는 것을 지켜보던 윤이 정색을 했다. '“그런데 에드워드. 너 어째 볼이 좀 홀쭉하다?”'정말이지 물 먹은 붕어처럼 빵빵해야 하는데 가뭄 만난 붕어처럼 홀쭉했다. '“어디 보자.”'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방용 저울을 찾았다. 몸무게를 재자 이사 전보다 0.1킬로그램이나 줄어 있었다.'“아유, 불쌍한 내 새끼. 살이 빠졌구나. 어쩌니? 안 되겠다. 맛있는 지렁이 사다 줄게. 고단백이라서 금세 기력을 회복할 거야. 조금만 기다려.”'보통 애완 거북은 미꾸라지나 작은 물고기를 먹지만 이상하게 에드워드는 딱히 그것들을 선호하지 않았다. 지렁이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녀도 여자인지라 지렁이를 볼 때마다 징그럽긴 하지만 에드워드를 위해서라면 그게 문제이랴. '안타까움을 참지 못한 윤은 지갑을 들고 그 길로 집을 나섰다. 새 동네의 지리를 몰라 한참을 헤맸지만 괜찮았다. 에드워드 입에 들어갈 지렁이를 생각하면! '집을 나온 지 거의 30분이 넘어서야 돌아온 윤이 신이 나 소리쳤다.'“에드워드, 고기 사 왔다!”'자랑하듯 봉지를 흔들었지만 에드워드 식의 인사가 없었다. 달그락달그락, 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윤이 에드워드 집으로 다가갔다. '에드워드가 없다! 물에 반쯤 잠긴 돌멩이 위에 느긋하게 배를 깔고 그녀를 보고 있어야 할 녀석이 사라졌다.'“얘가 어디 갔지?”'무게를 재느라 수조의 뚜껑을 닫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을 기어 나와 돌아다니는 녀석이 절대 아니다. 과묵한 만큼 행동도 굼떠 절대 밖을 나다니는 녀석이 아닌데…… 근래 이사니 뭐니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에드워드!”'느릿느릿 기어 나올 녀석을 상상하며 크게 불러 보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윤은 후다닥 허리를 굽혀 소파 아래를 살펴보았다.'“에드워드, 너 어디 있는 거야? 지렁이 사 왔다니까? 얘들 죽기 전에 얼른 나와!”'그럼에도 들려오는 소리가 없다. 걸을 때 딱딱한 껍질이 바닥에 부딪쳐 늘 딱딱 소리가 나는 녀석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욕실로 뛰어가 봐도 없고 침실로 들어가 봐도 없다. 주방에도 당연히 없었다. 당황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불길함에 심장이 두근거리지만 윤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녀석이 제 집을 탈출해도 어차피 이 집 안이다. 느림의 미학을 보여 주는 거북이 아닌가. 제 녀석이 빨라 봤자, 그래도 거북인 것을.'“반드시 찾아 주겠어.”'윤은 비장한 각오로 조금 전 막 정리를 끝낸 집을 뒤집기 시작했다.'하지만 없었다. 에드워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혹시라도 배수구에 빠졌나 해서 욕실이며 주방 배수구를 다 파헤쳐 봐도 녀석은 없었다. 7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소란에 윤은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퇴근길에 고등학생 시절부터 절친인 선주가 놀러왔다 기가 차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너의 얼굴을 덮은 그 수심이 전부 에드워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응, 어디에도 없어.”'눈물 젖은 윤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주가 퉁을 줬다.'“참 가지가지 한다. 네가 어린 왕자냐? 왜, 너도 에드워드 찾아 이 별을 떠나지 그래? 길 가는 사람 막고 물어봐라. 애완 거북이 사라졌다고 이렇게 머리 싸매고 누워 통곡한다면 아주 배가 불렀다고 욕을 퍼부을 거야. 청승 그만 떨고 얼른 일어나. 내가 다른 거북이 사 줄게.”'“왜!”'시체처럼 누워 있던 윤이 갑자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꽥 소리를 질렀다.'“깜짝이야. 얘가 왜 이래?”'선주가 씩씩거리는 윤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았다.'“왜 이러긴! 대체 왜 어린 왕자의 사막여우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나, 이윤의 에드워드는 그렇게 하찮게 생각하는 건데? 걔도 목숨이 붙어 있는 생명체인데! 걔랑 다른 거북이랑 같아? 나한테 에드워드는 세상 누구하고도 못 바꿀 존재란 말이야.”'거품을 물고 흥분하는 윤의 모습을 멍하게 보던 선주가 손사래를 쳤다.'“아, 알았어. 그만해,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