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콜록.”'며칠째 떼어지지 않는 감기 때문에 고생 좀 했다. 현준은 편의점에서 감기에 좋다는 유자차를 샀다. 빨리 감기가 나아서, 김민하와 이진헌을 본 뒤에 생긴 불쾌한 기분도 함께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왔어?”'약속한 시간에 장미의 오피스텔로 들어섰을 때, 비싼 정장에 액세서리를 두르고 있는 장미는 스마트폰으로 일을 보고 있었다. 약간의 여가조차 허락하지 않는 여자였다. 그 많은 남자들에다 일까지 꼼꼼히 챙기는 그녀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씻을게요.”'“그냥 이리 와. 나 시간 없어.”'한 손으로 대충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킨다. 평소 같았으면 군말 없이 따라주었겠지만 현준은 오늘따라 내키지 않았다. 자신이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애인도 뭣도 아닌 이런 관계도 지겨워졌다.'“벗어.”'장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른하게 현준을 쳐다보았다. 현준은 옷을 벗는 대신,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장미의 몸이 그를 향해 기울어졌다. 차가운 손길로 그녀는 그의 셔츠를 더듬기 시작했다.'“요새 운동해?”'“콜록, 콜록.”'현준은 낯선 이질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늘 익숙하던 그녀의 손길에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거부감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장미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는 혐오감에, 그는 손등으로 기침을 틀어막았다.'“감기야?”'어찌되든 괜찮다는 듯, 장미는 자연스럽게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한철 감기야 약하게 앓고 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현준의 가슴팍에 기댔다.'“아, 좋다.”'따뜻한 품에서 긴장을 푸는 그녀와 달리, 현준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장미가 입을 맞추려 했지만 그는 얼굴을 돌렸다.'“비싸게 굴기는.”'장미는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마는 성미였다. 굳게 다문 현준의 입술이 오늘따라 탐이 났다. 평소엔 별 생각 없었는데 그가 슬쩍 피한다는 것을 알고 더 가지고 싶어졌다. 그녀는 아예 작정을 하고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탁.'“뭐야?”'“그냥 좀.”'하지만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는 현준의 행동에, 당황한 장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장미는 그제야 그가 많이 아픈가 싶어 얼굴을 짚어 보려 했지만 현준은 그런 손길마저 저지했다.'“재미없어졌어.”'현준은 이런 상황에서 왜 민하의 학생증이 떠오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갈 수 없었던 학교에 남들은 보기 좋게 다니고 있는 게 왠지 화가 나고 억울했다. 밥맛이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그는 여자들에 대한 성욕조차 잃어버렸다.'“미안해요, 누나. 이제 다른 남자 알아봐야겠는데.”'“하,”'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을 치는 장미의 옆에서 현준은 묵묵히 풀린 단추를 잠갔다. 지금껏 그만큼 안아줬으니 이 여자에게 계산은 확실하게 했다. 태연하게 자리를 빠져나오는 그에겐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고, 덕분에 장미는 오피스텔에 홀로 남겨졌다.'“콜록, 콜록.”'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머리에 열이 올라, 현준은 이마를 짚으며 계단을 내려가다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빨리 민하에게 빚진 돈을 갚고 이진헌의 뒤를 캐리라. 어떻게든 행동을 해야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았다.'Rrrrr. Rrrrr.'“여보세요.”'“나야. 채무자.”'“아.”'신호음 끝에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현준은 잘못 걸었다고 끊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조금 더 그녀와 통화해보겠다는 생각에,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음성을 가만히 들었다.'“콜록, 콜록.”'“뭐야, 너. 감기 걸렸어?”'“별거 아냐.”'“끊어, 옮겠다.”'“너 원래 이렇게 정이 없냐?”'“아. 암튼, 용건이 뭔데.”'“돈 갚을게. 내일 보자.”'“좋아. 그럼 나도 시계를 들고 나가지.”'무슨 거래라도 하는 것 같은 비장함에 피식 웃음이 났다. '“잘 챙겨서 나와.”'현준은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을 그녀의 동그란 두 눈이 얼핏 그려지는 것 같았다. 현준은 가까스로 기운을 내어 자리에서 일어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