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늦여름의 햇살 때문이 아니었다. 평상시보다 늦게 일어나 지각해 선도선생한테 까일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도, 전학 온 지 얼마 안 돼 다른 세계의 이방인처럼 반에서 겉도는 것 때문도 아니었다. 지영은 인상을 쓰며 다시 눈을 감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미세하게 두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오늘 같은 날은 그냥 학교를 쉬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학생한테도 직장인들처럼 꼭 필요할 때 월차를 쓰는 제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갑자기 빼도 박도 못하는 엄격하게 정해진 틀 속에 갇혀있는 신세의 학생처지가 억울하고 서글퍼져 지영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에 있는 것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고 몸만 나가. 당신이 가진 것 모두 놓고 나가라고. 지영이도 만날 생각 하지 마. 부도덕한 아빠에게 그럴 권리도 없어.”' 다시 지영의 머릿속으로 어젯밤 엄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온기가 없다. 화가 났을 때는 물론 그렇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엄마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차가웠다. 선전포고하듯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단호한 엄마의 말에 아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고집스럽게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더 이상 엄마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을까? 지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랬다. 아빠는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깊이를, 도대체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빠의 눈빛이 지영은 싫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마도 엄마는 지영 자신보다 몇 배는 그런 아빠가 더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속내를 감추는 아빠는 아니었다. 어쩌다 한번 속내를 비출 때는 무자비하게 감정을 드러내놓기도 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숨이 막힌다. 아빠의 그 짧은 한마디에 모든 것이 내포되어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때 사랑했던 사람한테 그런 무자비한 말을 들었을 때 엄마의 심정은 가히 상상할 만 했다. ' 한동안 안방 문에 기대어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지영은 문득 시선을 현관으로 돌렸다. 현관발치에 아빠의 여행 가방이 보였다. 단출한 가방이었다. 2박 3일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기 딱 좋을 것 같은. 그렇다. 아빠는 오늘밤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2박3일이 아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지영의 책상 위에 사랑한다는 말만 적힌 편지를 두고. 지영은 읽자마자 미련 없이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지영은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아빠가 나갔다. 지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살며시 열었다. 아빠가 보였다. 한 손에 가볍게 여행 가방을 든 아빠가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여행 가방만큼 아빠의 어깨도 가벼워 보였다. 마치 엄마에게 벗어난 것이 홀가분한 것처럼 보였다. 내내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은 듯 했다. 엄마는 아빠의 목에 걸린 가시였을까? 정말 그런 존재밖에 안 되는 거였을까? 18년이나 같이 동고동락했는데…….' 세월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럼 나는 뭐였을까? 지영은 생각했다. 엄마가 커다란 가시라면 나는 작은 가시였을까? 그래봤자 어차피 똑같은 가시거늘. 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시모녀라니. 결국 그 크고 작은 가시가 아빠를 숨 못 쉬게 만든 것이다.' 떠나가는 아빠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고 있던 지영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의 창을 올려다보는 아빠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눈빛으로 한동안 아빠는 그렇게 지영을 바라보았다. 순간 놀란 지영은 커튼을 확 치고 창을 등지고 섰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뭔가 가슴 속의 뜨거운 멍울 같은 것이 몸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냥 가버리지, 왜 뒤 돌아보는 거야. 뭔가를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지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로 가 쓰러지듯 앉았다. 그때 침대 맡에 전화벨이 울렸다. 힐끗 보니 아빠였다. 지영은 손을 뻗어 전화를 잡았다. 잠시 망설인 그녀는 미련 없이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그녀와 엄마를 버린 아빠를 마음에서 분리시키듯. 그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 뒤집어쓴 이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난밤 일들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듯 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한숨도 자지 못한 지영은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학교에 가야했다. 달리 갈 곳이 없었다.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지영은 가방을 대충 챙겼다. 하지만 미술도구는 꼼꼼히 챙겼다.'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 아빠가 없는 집은 왠지 공기가 달랐다. 한 사람의 온기가 빠져나간 만큼 서늘했다. 훗! 말도 안 돼. 아빠는 원래 출장이니 뭐니 하며 별로 집에 없었잖아. 아마도 기분 탓일 것이다. 그래 기분 탓. 그렇게 결정짓고 지영은 고개를 돌려 엄마의 방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방은(이제 아빠는 없으니 온전히 엄마의 방이다.) 닫혀있었다. 가만히 방문에 귀를 기울려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방문을 열어볼까하다 지영은 그만두었다. 왠지 엄마가 불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엄마는 잘 견디어낼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도 들었고, 이상하게 버림받은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빠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어차피 아빠보다 일을 더 사랑한 여자였다. 자신을 인정해 주는 그 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냉정하게 짚어보면 애정 없는 맞벌이 부부가 헤어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는 어른들만의 상황과 사정이란 것이 있을 것이다. 지영은 최대한 어른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벅찼다.' 저 멀리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오늘도 만원버스였다. 팔다리가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모를 정도의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지영은 순간이동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장소뿐만이 아니라 시간도 훌쩍 뛰어넘고 싶었다. 한 십 년쯤. 28살. 그 나이가 되면 온전한 자립을 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에게도 감정이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을까? 하지만 당장 한 시간 한 시간이 하루고 한 달 같은 지영에게 십 년이란 세월은 백년의 세월만큼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금방 내릴 곳이다. 하지만 지영은 내릴 준비보다 또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나저나 어떤 여자일까? 아빠의 마음속에 있는 여자는. 엄마와는 아주 다른 여자겠지. 아빠를 숨 쉬게 해주는 여자겠지. 꼭 한번은 보고 싶었다. ' 지영은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잠깐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뭐지? 저 녀석은? 꼭 버스 안에 저런 놈이 하나씩은 있다. 불쾌했다.' 지영은 녀석의 시선을 무시하고 버스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두통이 더 심해졌다. 양호실에 들러 아스피린을 하나 먹어야겠다. '' “오늘도 지각이겠군.”' 하지만 손목시계를 본 정우의 표정은 느긋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가을하늘, 어디론가 바삐 걸어 다니는 사람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일찍 문을 연 테이크 아웃점들, 거리의 오염을 치우는 무표정한 얼굴의 청소부 아저씨, 그 어느 것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나도 저런 일상 모습들 중 한부분이겠지. 한동안 창밖 풍경을 권태롭게 바라보다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생각도 담지 않은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머물렀다. 순간 정우의 나른했던 얼굴에 미세한 생기가 감돌았다. 어? 저 여자애 또 보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런 식으로 버스에서 서너 번은 본 듯하다.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녀는 마치 흑백사진 속으로 들어온 천연색 같았다. 그 천연색은 활력 없는 일상에 탄력을 던져주었다. 그 나이또래 여자에게 찾아볼 수 없는 이질감이라고 해야 하나? 딱히 단정 지을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사실 왜 그녀에게 눈길이 갔는지 그도 잘은 모른다. 그냥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머물렀다. 마치 작열하는 강한 햇살에 눈을 찡그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처럼. ' 그녀는 한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화려한 외모로 시선을 끌 타입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의 표정이 그의 시선을 잡았다는 것이 더 정확할 거라 정우는 생각했다. 약간은 고집스럽고 도전적인 그녀의 표정,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근처에도 오지 마, 관심 끊어 라고 그녀의 얼굴에 혹은 그녀의 눈빛에 쓰여 있는 듯 했다. 왠지 그 경고하는 듯한 분위기가 역설적으로 더 그녀에게 가까이 가보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언제나처럼 나른한 정우의 일상이 그의 관심을 끌만한 무언가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 만원버스에서 그녀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정우는 눈을 내리깔며 내릴 차비를 하는 그녀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타고 오는 내내 만원버스에서 시달린 그녀는 짜증이 나는 듯 미간을 모았다. 입 모양을 보니 뭔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 욕 같았다. ' 계집애, 성깔 좀 있나 보군. 정우는 피식 웃으며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녀와 그의 목적지는 같다. 곧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닌다. 3년 내내 안 보이다가 최근 들어 모습을 보인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녀는 전학생이 아닐까? 정우는 추측했다. ' 한 쪽 어깨에는 가방을 또 다른 어깨에는 미술도구를 멘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정우도 손목시계를 한 번 힐끗 거린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교문 앞에 선도부 선생이 나와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보기 좋게 아니 학생들 때리기 편리한 모양으로 깎은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가볍게 툭툭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선생의 입가에는 기분 나쁜 미소가 걸쳐 있었다. 빨리 튀어 와라, 교문 곧 닫힌다, 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선생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며 입으로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맞추어 고개도 까딱거렸다. 그 선생은 정우가 학교에서 제일 밥맛 없어하는, 정말 선생만 아니면 제대로 맞짱 한 번 뜨고 싶은 선생이었다. 그는 남학생에게는 폭력적이고 여학생에게는 심히 끈적거리는, 학교 마다 꼭 하나씩은 있는 선생이었다.' 재수 없는 자식! 내가 졸업만 하면 언제 한번 당신 손 봐 줄테니 각오나 하셔. 선생을 바라보는 정우의 눈에 힘이 슬며시 들어갔다. 동시에 입꼬리 한쪽도 올라갔다. 학교 이사장의 조카라는 정우의 조건 때문에 정우가 그 저질 선생한테 특별히 당한 것은 없지만, 학생들을 대하는 그 선생의 태도는 어딘가에 분출하고 싶은 정우의 반항적인 기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위압적인 선생의 모습에 겁먹은 학생들은 달리기 선수처럼 제각기 뛰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그녀도 뛰었다. ' “으악!”' 무리 속에서 달리던 그녀는 어딘가에 발을 접질렀는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주변의 달리던 학생들은 그녀를 한번 힐끗거릴 뿐, 제 갈 길 가기 바빴다. 넘어질 때 열렸는지 그녀의 가방에서 교과서와 기타 등등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림도구도 그녀 멀찍이 나뒹굴었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