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黃泉).'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멍한 그의 시야에 비치는 건 마치 노란색을 칠해 놓은 거친 땅과 어둠을 베어 놓은 듯한 하늘, 그리고 대지 위에 펼쳐진 끝없는 꽃의 구렁이었다.'그가 디디고 있는 노란 땅은 수분 하나 머금고 있지 않아 모래처럼 알알이 부서졌다. 사방을 굽어보면 빛나는 모래들이 사막처럼 끝도 없이 잔뜩 깔려 있었다. 수평선 너머까지 노란 땅은 한없이 길게 이어지며 그 땅을 떠받치고 있는 하늘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별도 달도 태양도 존재하지 않는 하늘. 그저 노란 땅이 발광하는 빛으로 가득한 하늘은 빛 하나 없는 무저갱(無底坑)이었다.'마른 대지와 검은 하늘 사이에는 오직 꽃들만이 존재했다. 줄기며 꽃잎의 색이 전부 피보다 붉은 빛을 띠고 있는 꽃. 황천에 온 이들은 그것을 ‘목숨꽃’이라 불렀다.'가끔은 바람도 불었다. 바람이 불면 휘영청 흩날리는 꽃들의 군무가 이어졌다. 그는 질리는 기색 하나 없이 꽃들의 춤을 계속해서 보고 또 보았다. 그는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그의 꽃은 이미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어 누구도 꽃을 살려낼 수 없었다. 이미 시들어 버려 꽃잎조차 남지 않았고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퍼석한 대지에 있는 꽃에게 물을 줄 수도 없다. 심지어 그의 꽃에는 벌레도 해충도 끼지 않았다. 말라 죽어 버린 꽃을 보며 소년은 이따금 묘한 서글픔을 느꼈다. 하나, 기억조차 없는 영혼. 그는 아무것도 추억할 수 없었다.'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그러던 어느 날 변화가 일어났다. 검은 하늘을 열고 날아오는 낯선 존재가 보였다. 방울 소리를 울리며 하늘을 요란하게 날아가고 있는 자. 바로 오구 오구: 오구굿은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며 극락왕생을 비는 굿이다. 이 소설에서 오구란 단어를 영혼을 지하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로 설정하였다. '였다.'오구는 방울 소리로 길을 잃은 영혼들을 저승으로 이끌고 인도하는 자였다. 오구의 뒤로 이승의 망령들이 줄을 지어 따라오고 있었다. 그날 소년이 만난 오구는 오구들의 일족 중 가장 힘이 세고 그 능력이 으뜸이라는 오구할미였다.'날아가던 오구할미는 시선을 느끼고 사방을 굽어보다 시든 생명꽃 아래 앉은 소년을 발견했다. 할미는 괴이함을 느끼며 영혼들을 품속으로 갈무리한 뒤 노란 땅 위로 내려앉았다. 오구할미가 내려오자 의지를 가진 생명꽃들은 몸을 피해 할미가 앉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그녀는 소년의 꽃 앞으로 다가와 옹송그리며 주저앉은 소년을 보며 물었다.'-너는 길을 잃었느냐.'그가 고개를 저었다.'-그럼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다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으니 그 질문은 무의미했다. 오구할미는 더 질문할 것이 없자 꽃의 그늘 아래로 숨는 그를 훔쳐보았다.'-상서화가 말라 죽었구나. 한데 왜 죽은 자가 이 도솔천의 강을 건너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냐.'한참이나 상서화를 살펴보던 오구할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맙소사, 꽃이 죽지 않았다. 뿌리가 살아있는 것이구나. 겨울을 나는 식물들처럼 지상부가 죽어있을 뿐이로구나.'오구할미로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응당 그 목숨꽃이 시들고 말라 죽어 버려야 하지 않는가.'오구할미가 한참이나 이 괴상한 꽃에 골몰하고 있을 때 할미가 내려놓은 등불 주변으로 많은 귀신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색깔과 빛이 모두 제각각인 영혼들을 살펴보며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검은 옷의 저승 차사(差使) 저승사자를 말한다. '가 나타났다.'-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저승 차사는 저승을 다스리는 열 명의 시왕(十王)이 부리는 졸개들로 그들은 수명부에 적힌 사람의 수명에 따라 영혼을 회수하며 죽음을 관장한다. 이승과 저승의 문을 열고 떠도는 영혼을 강제로 회수할 수도 있다. 차사들에게도 그 등급과 위치가 있으니 황천에 머물러 있는 이 차사는 말단 중에서도 말단이었다.'말단 차사는 저보다 높은 오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목에 힘을 주어 다시 소리쳤다.'-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지 않았소!'오구할미는 자신의 남루한 차림을 살펴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손에 쥐고 있던 방울을 흔들며 그 방울의 끝으로 소년을 가리켰다.'-삼도천의 물을 마신 자, 그리하여 생전의 기억을 잃은 망령이 왜 이 서천 꽃밭에 남아 있소?'오구할미의 방울뭉치를 발견한 뒤에야 차사는 할미가 오구임을 알아보았고 오구할미가 가리키는 소년을 본 뒤 더 당황했다. 오구할미 역시 차사의 반응으로 보아 이 소년이 꽤나 골칫덩어리임을 깨달았다.'-이런 일은 선례가 없는지라 저희도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차사는 아까보다 매우 공손해져 있었다. 말단 차사는 시왕들에게 조차 존대를 받는 오구의 일족 수장에게 예를 표했다. '-무슨 선례?'오구할미가 재차 묻자 차사가 답을 했다.'-저 영혼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죽임을 당했지요. 그 원한이 뿌리가 깊었던 터인데다 저자는 일국의 왕이 되었어야 할 자. 하나, 이자에게 가야 할 기린이 살해당하고 그 피를 뒤집어써서 죽게 된 것이니 선계로서도 저자의 죽음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하늘의 운명을 벗어나 버린 자, 돌발적인 죽음을 맞은 자.'오구할미는 소년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일국의 왕이었어야 할 운명을 지닌 자 치고는 너무나 볼품없어 보이기까지 한 소년이다. 자신의 운명을 이탈하여, 역천(逆天)의 운명을 지니게 된 자.'차사는 자신의 검은 도포자락 안에서 인간의 생명을 기록한 수명부와 자신이 할당받은 살생부를 꺼내어 오구할미에게 보여주었다.'-보기 드문, 기린의 왕기를 받은 자이지요. 그리고 그 기린의 피를 뒤집어쓰고 죽어 버린 자입니다. 현실의 몸은 죽었으나 기이하게도 이 상서화의 뿌리만이 근근이 살아남아 있지요. 운명이 뒤집힌 채 죽어 버린 이자 덕분에 지계와 선계, 지상이 떠들썩했다 합니다. 천수는 남아 있으나 돌아갈 육체가 없고 목숨꽃이 피어 있지 않으니 육체를 만들어서 되살릴 수도 없습니다.'오구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설마 용인의 피를 강하게 지녔다던 인간?'-용인의 피가 강해 그 힘을 봉인하다 보니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요. 20년 전엔가 산 인간이 아내를 살리겠다며 숨어들었다는 이후로 이런 난리도 없었지요.'차사는 오구할미가 있는 것도 모른 채 한탄했다.'저승이란 곳은 매일 죽은 영혼들과 죽은 자들의 망령이 넘쳐났다. 초목에서부터 인간, 축생까지 갖가지 영혼들이 모이다 보니 온갖 해괴하고 신비로운 일들이 다 벌어지기도 했다. 수명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천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어 버린 영혼들도 즐비했다.'그런 저승을 몇 십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뒤집어 들쑤시는 존재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금은요동의 눈을 가진 반요인들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몸으로 저승에 찾아들어 서천 꽃밭을 휘젓고 다니곤 했다. 그들의 눈은 죽은 자와 산 자들 모두를 굴복시키는 힘이 있는지라 산 자의 법칙에도 죽은 자의 법칙에도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다.'그자들이 올 때마다 저승은 한바탕 난리를 겪곤 했는데, 오구할미의 기억 속에도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찾아왔다는 기이한 사내가 떠올랐다. 그 사내는 살아있는 몸으로 산 자가 건널 수 없다는 명계의 강, 삼도천(三途川)을 건넌 뒤 상서화가 가득히 핀 서천 꽃밭에는 돌아오지 않았다.'금은요동의 인간들이라면 질리도록 겪어 본 차사들조차도 선계가 내린 기린의 피를 뒤집어쓰고 죽은 왕의 기운을 지닌 자를 맞아 본 적은 아예 없었다. 선계가 공언한 왕이 죽어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그 예기치 못한 운명 덕분에 3계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