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생기가 가득했던 수아의 눈빛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거라고 여겼던 원망 어린 눈동자도 증오가 담긴 눈동자도 아닌 공허하기만 한 두 눈. 그 텅 빈 두 눈을 마주 대하는 순간 준혁의 심장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아픔…… 슬픔…… 고통이 준혁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이를 악물어 가며 그 고통을 참아내던 준혁이 눈앞에 서 있는 수아를 더는 바라보지 못하고 와락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한 치의 틈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수아를 품에 꼭 끌어안은 준혁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이 여자를 찾아 헤맸던 지옥 같기만 했던 지난 57일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하아!”'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무서웠었다. 두려웠었다. 다시는, 다시는 이 여자를 품에 안지 못할까 봐.'준혁은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수아가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그녀를 품에 안은 손으로 머리를, 등을 쉴 새 없이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순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야윈 그녀의 몸이 만져지자 눈시울도 뜨거워졌다.'“……미, 미안하다.”'서준혁의 인생에서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영원히 매장되어 버린 말이라고 생각했던 미안하다는 말이 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동안 수아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고 또 주면서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미안하다는 말이었다.'왜 그랬을까. 정말 왜 그랬을까. 왜 나란 놈은 작고 여린 이 여자에게 상처를 주기만 했을까. 왜 이 여자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을까?'두 손을 축 늘어트린 채 미동도 없이 인형처럼 품에 안겨 있기만 한 수아를 준혁은 더욱 힘주어 안았다.'“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미안해…….”'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내내 한 자락의 반응도 보이지 않던 수아가 준혁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그러나 준혁은 그 반응조차도 감사했다.'“미안…….”'“잊어요!”'수아는 또 한 번의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 놓으려는 준혁의 말을 차가우면서 단호한 어조로 잘라냈다.'“모두 잊으세요!”'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준혁을 향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얼굴을 한 수아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 다 잊으세요. 당신밖에 몰랐던 나도, 당신밖에 품을 줄 몰랐던 내 마음도, 그래서 당신을 질리게 만들었던 내 사랑도, 당신을 힘겹게 만들었던…… 마, 만들었던…….”'차마 다음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리던 수아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수아는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아이, 아이도, 잊으세요.”'결국 뱉어 버린 아이라는 말. 그 말을 토해내는 수아의 두 눈이 벌겋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디굵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넘치고 말았다. 홀로 보낸 지난 시간 동안 모두 쏟아 버려 더는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금 수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목 놓아 서럽게 우는 것도 아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도 아닌 고작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방울뿐인 눈물이었지만 그 한 방울의 눈물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준혁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안녕히 가세요.”'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리는 수아를 잡기 위해 준혁의 손이 절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준혁의 손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춰 버렸다.'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잡는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힘없이 손을 떨어트린 준혁은 멀어져 가는 수아의 뒷모습을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