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힘과 정신을 소진하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던 이현이 깨어난 건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였다. 비척비척 내려와서 소파에 앉아 헨리를 찾았지만 그는 집에 없는 듯했다.'“꿈같다.”'오랜만에 눌러 보는 피아노의 감촉이 손끝에 되살아났다. 대단히 고상해 보이는 악기이지만 88개의 망치가 건반을 두드려야 하기 때문에 알캉의 마이너에튀드 11번 정도 되는 곡을 치려면 상당한 체력이 필요했다. 그걸 3년이나 쉬고 무작정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 모아 쳤으니 굳었던 손가락이나 팔이 막노동을 하고 난 듯 뻐근하고 아팠다.'“일어났네.”'외출한 줄 알았는데 그는 집에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바지만 입고 상체는 홀딱 벗어 맨몸을 드러낸 그를 보고 이현은 볼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옷 좀 입고 와요.”'“왜? 떨려?”'그가 물을 마시며 가까이 다가왔다.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몸을 힐끗 훔쳐보고 고개를 돌리자 헨리는 귀엽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얼른요.”'손을 휘휘 저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걸 거부하는 재촉에 그는 브이넥 흰 티셔츠를 입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현은 널찍한 소파에 몸을 누이고 저 높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피아노에 집착하던 모습이 떠올라 그의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나……되게 한심하죠.”'중얼거리듯 말하는 그녀를 헨리는 아무 대답 없이 바라보았다.'“이제는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역시 안 되나 봐요. 안 되려나 봐.”'팔이 아픈 만큼 가슴도 쓰라렸다. 참담함이 건반을 눌렀던 손가락 끝에서부터 마치 독처럼 퍼져왔다. 끝내는 할 수 없었다는 실패에의 자각, 하나도 벗어난 것이 없다는 괴로움이 또 한 번 그녀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피아노가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진 꿈이 되었다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프고 슬펐다.'“그래. 한심해.”'서늘함이 깃든 그의 목소리. '“네 기준에서 잘한 게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넌 어제 정말 잘했어. 그걸 모른다니 한심하지. 모른 척 하는 거면 더 한심하고.” '그의 힐난에 이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편한 자세로 반쯤 누운 그의 모습은 순간 숙연해질 만큼 위압적이고 컸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소름이 돋았다.'“네가 전에 그랬지. 날 보면 존경스럽다고.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 최고라는 수식어를 늘 이름처럼 붙여 주곤 하지. 누구나 정상에 서 있으면 추락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럴 때 내가 뭐로 그걸 이기는 줄 알아?”'“…….”'“자만심.” '이현의 가슴이 날카롭게 흔들렸다.'“내 플레이를 보지 않으면 너희는 후회할 거다. 최고의 플레이를 놓치고 싶지 않으면 잘 봐라. 그런 자만심으로 날 다스렸어. 그건 오기라는 말로도 어느 쯤 설명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 자신을 비웠지. 그래서 설사 그날 경기가 실패해도, 내가 좀 부진한 것 같아도 좌절하거나 상처 받지 않게 말이야.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누구나 이 정도 후퇴쯤은 겪으니까 다시 털고 나아가면 된다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다.”'기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탄호이저가 방황을 하다 연인의 사랑과 죽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웅장하고 숭고하면서도 낭만적인 선율이 실린 피아노의 맑은 음색을 듣고 싶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서곡. '손끝에서 다시 피아노 건반의 아름답고도 차가운 감촉이 꿈틀거렸다. 중독성 마약과도 같은 촉감과 음색을 더듬고 싶었다.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은 그래야해. 자만심이란 거, 별거 아니야. 내 연주를 듣지 못하면 너희는 후회할 거다, 이렇게 남한테 최면을 걸고 나한테 각오를 다지는 거다. 이 악물고 말이야.”'자만심. 그 한 단어에 왜 이리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탄호이저가 구원을 받고 싶어 하는 그 심정이 그녀와 같다면, 지금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누구보다 잘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은 격정적으로 하지만, 담담하게 추억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