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 햇살이 들지 않는 반지하에 위치한 두 칸짜리 셋방의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 입구엔 수명이 다한 듯 쉭쉭 소리를 내는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가는 중이었지만 집 안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한 평 남짓한 거실의 한쪽 벽면엔 겨우 주방의 흉내를 내며 싱크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청소를 한 듯, 번들번들 빛이 나는 싱크대 위에 놓인 샛노란 개구리 모양의 녹음기에서 흘러간 옛 가요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집 안을 채우고 있었다. '오전 내내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느라 땀에 흠뻑 젖은 연우는 문이란 문들은 훤히 열려있는 집 안을 휘둘러보곤 그제야 만족스런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걸레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입고 있는 민소매셔츠가 땀에 절어 등에 착 달라붙어있었지만 기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욕실 또한 거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좌변기와 세면대가 나란히 들어앉은 것이 기특할 지경으로 좁았다. 그녀가 들어서자 조금의 여유도 없이 욕실이 꽉 찼다. 하지만 좁은 집 안에 익숙한 연우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자리를 잡고 걸레를 빨기 시작했다. '내일은 시아버님이나 다름없는 분의 생신이다. 그녀가 늦잠을 자겠다고 버둥거리는 쌍둥이 형제를 몰아내고 쓸고 닦고 집을 치운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물론 벌써 몇 년째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계신 분이 집에서 생신을 맞으실 리 만무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인인 준영의 아버지와의 사이는 남달랐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녀에게 준영의 아버지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친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해주신 유일한 분이셨다. 그런 분이 사고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계신 지 벌써 2년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졸업하던 해, 준영과의 결혼 말이 오가던 상황에 사고가 났다. 공사장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쫓아다니며 하루도 쉬지 않고 막노동을 나가시면서도 힘든 기색 한 번 보이시지 않으시더니 그예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그 일이 일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안 그래도 아직 어린 쌍둥이 남동생들과 홀아버지로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집안이라며 탐탁지 않아 하던 엄마와 오빠는 결사반대를 부르짖으며 결혼 말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준영을 외면했다. '싸늘한 태도로 돌변한 엄마와 오빠를 보며 그녀는 절망했지만 준영이 그런 그녀를 달랬다.'‘시간은 우리 편이야. 조급해하지 마.’'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준영의 얼굴은 서늘한 그늘로 뒤덮였다. 뚜렷한 직업이 없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능력해 보이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가장으로 군대를 면제받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도 똑같은 얼굴이었다는 것을 떠올린 그녀는 입술만 깨물어야 했을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그리고 시간이 유수처럼 잘도 흘러갔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던 준영은 빠른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다가 지금은 1년간의 해외연수 겸 근무를 발령받아 미국지사에 나가 있었다. 그렇게 생이별을 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망설이는 준영의 등을 떠민 것이 자신이면서도 연우는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리움이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그녀를 엄습했다. 처음 얼마간은 매일매일 이메일이 왔고 이 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통화도 했었다. 그런데 점점 이메일을 보내오는 날짜가 멀어지더니 통화를 못하고 지난 지도 벌써 두 달이 훨씬 넘었다. '연락하지 못하는 그는 오죽할까 싶으면서도 불안했고, 다음 달이면 그가 귀국한다는 것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리움이 문제였다. 그를 향한 그리움이 녹아내려 혈관을 타고 흘렀고 뼈 마디마디에 사무쳐 그녀는 하루하루 견뎌내기가 점점 힘들었다.'하루에도 골백번은 다 때려치우고 준영이 있는 미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책임지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준영과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혼인신고를 해놓은 것도 아닌 마당에 그의 가족들을 맡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엄마와 오빠, 그리고 친구들까지 펄펄 뛰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오빠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가둬버리는 바람에 그만둬야 했었고 엄마는 화장실 가는 것도 못 미더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지켰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변치 않는 그녀의 고집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을 하셨고 지금은 오히려 밑반찬이며 여러 가지 자잘한 살림의 지혜들을 알려주시곤 한다. 지난 7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걸레를 주무르는 연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차준영이 미치게 보고 싶다.”'너무 보고 싶어 눈이 짓무르고 가슴은 그에 대한 허기로 바짝 말랐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쌍둥이도 쌍둥이지만 그녀에겐 준영만큼이나 그의 아버지도 소중했다.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을 찾고 있었다.'살이 에이게 추운 어느 겨울날, 오래 입어 색 바랜 파카의 지퍼를 열고 행여 식을까, 품속에 꼭꼭 품고 오신 붕어빵을 꺼내 주시며 혼자만 먹으라던 분이셨다. 그리고 이내 부끄럽다는 듯, 시꺼멓게 때가 낀 손을 주머니 속에 감추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씻어도 손톱 밑의 때가 빠지지 않는다, 시며 그녀 앞에선 늘 주먹을 말아 쥐고 계셨었다.'병원에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떠올린 연우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준영이 보고 싶은 것만큼이나 아버지가 깨어나길 바라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신이 원망스러웠다. 기적이 일어나 아버지가 깨어나실 수만 있다면 그녀는 못할 짓이 없을 것 같았다.'룰루루, 룰루루.'입고 있는 반바지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음악소리를 토해냈다. 요 근래 단 한 순간도 휴대전화를 품에서 놓지 않고 있었던 그녀는 고무장갑을 벗을 새도 없이, 준영이길 간절히 바라며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부터 들여다보았다. 쌍둥이 형제 중, 큰 녀석의 이름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통화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튀어나간 목소리는 밝다 못해 통통 튀었다.'“차건이, 배고파서 전화했지?”''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이글거렸다. 오뉴월 땡볕이 장난이 아니라더니 오늘이 딱 그랬다. 거리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는 것 같았다. 시장 입구에서 기다리는 녀석들을 만나 먼저 순대와 떡볶이로 배부터 채웠다. 그리고 함께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가로수가 없는 삭막한 골목에 그늘이라곤 없는지라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나마 무거운 수박이며 찬거리들은 쌍둥이들이 들고 있어 그녀의 손에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과자가 들어있는 무게가 거의 없는 봉지만 달랑 들려 있었다. 연우는 비어있는 손으로 연신 얼굴에서 땀을 닦아냈다.'“형수, 집에 가서 내가 등목 해줄게요.”'쌍둥이 중 몇 분 차이로 형의 자리를 꿰찬 건이가 실실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처음 소개를 받던 날, 열 살이었던 녀석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서 그녀를 당황하게 했었다. 그랬던 녀석들의 키가 어느새 180이 넘어버렸고 가끔 이렇게 그녀를 놀리며 맞먹으려 들었다. 지금은 그녀를 웃겨서 더위를 잊게 해줄 의도가 한눈에 보였지만 말이다.'“어허, 무엄하다. 엄연히 남녀가 유별한데 등목이라니,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는가!”'그녀는 짐짓 엄한 표정을 해보이며 호통을 쳤다. 당연하게도 쌍둥이들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 가득 담긴 장난기를 금방 알아보았다. '“어? 형수가 여자였어요?”'“그러게? 형수가 언제부터 여자였어요?”'건이에 이어 동생인 건우까지 제 형을 거들고 나섰다.'“어쭈구리? 너희들 무슨 말을 고로코롬 섭하게 하냐? 나야말로 세상천지에 유일하게 남은 천상여자인데!”'“윽, 천상여자라니, 한 번만 더 여학생들 울리고 다니면 내가 작신작신 밟아 죽여 놓을 테니 그리 알어! 그래 놓곤 뭐? 천상여자? 세상에 여자란 여자들은 다 죽어버린 모양이네!”'그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투덜거리는 녀석 때문에 언젠가 녀석들과 미팅을 한 여학생이 울며 집에까지 찾아온 일이 기억나, 연우는 피식 웃었다. '“내 말이!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알짜 없는 성질머리지.”'“알짜 없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괴팍, 그래 괴팍하다고 하면 또 몰라도!”'마치 누가 더 잘하나,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녀석이 앞 다투어 그녀를 놀려댔다. 그녀는 녀석들을 향해 눈을 부라려 보이기도 하고 킬킬거리며 혼자 웃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평평하던 골목길이 끝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시작되었다. 이 계단을 그와 함께 수없이 오르내렸다는 기억을 시작으로 또다시 그녀는 현실에서 멀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눈동자 속에, 가슴에, 그녀의 온몸에 꽉꽉 들어찬 그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세상이 온통 초록빛으로 빛나던 스무 살, 대학생이 된 그녀는 엄마를 졸라 처음으로 파마를 하고 새 옷도 몇 벌이나 구입했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친구들과 대학로를 쏘다니며 수험생이란 꼬리표에서 해방된 자유를 즐기고 미팅도 하며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그녀는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준영을 처음 보았고 감정의 뚜렷한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그는 깊이만 있을 뿐, 바닥이 없는 사람이었다.'젊음으로 활기 넘치는 무리 안에서 여유라곤 없는 사람이 그였다. 시간에도 감정에도 빈틈이라곤 없이 늘 바빴고 항상 무뚝뚝했다. 싱거운 농담 한마디에도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그녀를 빨아들인 것인지 모른다.'그녀는 해를 쫓는 해바라기처럼 그를 쫓았다.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그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수업이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준영을 기웃거리며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애가 마르는 봄이 지나고 숨을 헉헉거리게 만들던 태양이 가을을 맞아 수그러들 즈음, 드디어 준영이 그녀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웃지 마라.’'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식당으로 걸어가던 과 동기들 중 누군가가 무슨 말인가를 했고 그녀가 웃었던 모양이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불쑥 앞을 가로막은 준영이 다짜고짜 그 말만을 내뱉어놓고는 그녀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빠르게 멀어졌다. '그날 이후, 느리고 더뎠지만 차츰차츰 준영이 그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그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땀 맺힌 손을 맞잡고 늦은 밤거리를 함께 걸었고, 단골인 분식집의 김밥에 자판기 커피도 그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일류호텔 요리가 부럽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회색빛 하늘이 며칠이고 계속되던 어느 날, 이틀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햇볕도 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서 열이 펄펄 끓고 있는 그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었다.'그날 그의 가족을 처음으로 만났다. 열 살짜리 쌍둥이인 건이와 건우, 그리고 당장이라도 종합검진을 받아봐야 할 것 같은 모습으로 막노동을 다니신다는 아버지를.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도 눈이 마주칠라치면 후다닥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아버지와 양쪽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는 쌍둥이가 바로 그의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