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준은 이전보다 더욱 빠짐없이 유나를 데리러 나갔다. 오늘 역시 평소처럼 유나의 가방을 들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생글생글 웃으며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그녀의 수다에 간간이 대꾸해 가며 주차장을 향해 걷던 도중. 학생 한 명 보이지 않는 드넓은 길에서 상당히 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세 명의 남자가 갑작스레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폭주족들이나 입을 법한 불량스럽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보나, 과하게 염색했다거나 삐죽삐죽 세워져 있는 헤어스타일로 보나,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절대로 이 학교 학생은 아닌 듯싶었다. 그 중 우두머리인 분위기를 풍기는 빨간 머리의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더니 옆으로 고개를 휙 돌려서는 질겅질겅 씹고 있던 껌을 퉤, 하고 뱉었다.' “이거, 참……. 재수가 없으려니 말이야. 누구는 이 봄날에도 옆에 끼고 놀 여자 하나 없는데 이놈의 학교는 여기도 커플, 저기도 커플. 하나같이 쌍쌍으로 지랄들이야. 눈꼴 시려서 봐줄 수가 있어야지.”' 깜짝 놀란 유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세준은 그런 그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 머리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세준의 코앞까지 다가서더니 그를 향해 입술을 비틀며 빈정거렸다.' “혼자만 예쁜 여자랑 손 붙잡고 다니면 좋남? 옛날에 거 콩 한쪽도 나눠 먹으란 말이 있잖아. 좋은 건 다 같이 나눠 가져야지. 안 그래, 형씨?”' 온갖 폼은 다 잡고 있다지만, 그는 세준보다 키가 한참 작았기 때문에 별로 그럴싸한 장면이 연출되지는 않았다. 세준은 빨간 머리 남자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옆의 유나를 향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밀었다. 그에게서 들려오는 차분한 저음은 실로 오랜만에 듣는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저쪽 가서 서 있어…….”' 유나는 무척이나 겁이 났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서 가방을 받아다가 재빨리 저 멀리 구석으로 비켜섰다. 이럴 경우 자신이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결과적으로 봤을 때 가장 현명한 행동이 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히 걱정한답시고 그 주위에서 알짱거려 봤자 그녀의 존재는 세준에게 있어서 지켜야 할 방해물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무사하기를 빌어야 하는 쪽은 대기업 후계자로서 익힌 호신술이 특공무술, 태권도, 킥복싱을 모두 합쳐 무려 21단인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상대를 잘못 고른 저 철모르는 양아치 세 명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얼, 그 시추에이션은 뭐야? 지금 한 판 해 보기라도 하겠다는 거? 킥킥킥……. 애인 앞이라고 거 너무 가오 잡네. 그러다가 뒤지게 맞을라고. 어?”' 빨간 머리 남자는 뒤에서 낄낄대는 두 명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앞의 세준을 향해 발뒤꿈치까지 들어가면서 얼굴을 들이밀며 보기 싫게 히죽거리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 없이 서 있던 세준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 “그 더러운 면상 저리 치워. 역겨우니까.”' 신나게 야유하던 빨간 머리 남자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뭐? 아니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돌았나!”' 일순간 분노했는지, 바지춤에 꽂혀 있던 남자의 주먹이 순식간에 뻗어 나와 세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세준은 남자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는 한손으로 그의 손목을 탁 움켜쥐고 힘을 주어 꺾었다. 관절이 비틀리는 우두둑, 소리가 공포스러울만치 크게 울렸다.' “아아아아악……!”' 빨간 머리 남자는 왼손으로 꺾인 손목을 붙잡고 하늘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러 댔다. 그가 고통을 참지 못해 바닥에 쓰러지자, 당황한 나머지 두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일제히 세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로 벌어진 일은 정말로 눈 깜짝할 새 지나간 장면이었다. ' 동물적 감각을 곤두세우고 날카로운 눈길로 그들을 주시하던 세준은, 앞서서 뛰어온 한 명을 무릎으로 세게 찍어 올려 복부를 가격했다. 그가 배를 감싸 안고 나뒹굴며 신음을 토하는 사이, 나머지 한 명 역시 선제공격을 해 오는 세준에게 제대로 손을 쓰지도 못한 채 양 팔을 간단히 제압당하고 구둣발로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였다. 그 통증으로 상체가 숙여진 틈에, 이어서 옆구리마저 큭 소리가 나도록 얻어맞고 쓰러져버린 그 마지막 남자까지 해서 결국 세 명 모두가 한순간에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과 키스하며 굴러다니게 되었다.' 길거리 막싸움이나 취미삼아 해대는 양아치들에 비해 그의 움직임은 강한 힘이 실렸음에도 매우 신속했고 또 거침이 없었다. 채 1분도 되지 않았건만 승부는 이미 명확히 판가름이 나 버렸고, 세 남자가 몸을 웅크린 채 꺽꺽거리며 내는 괴로움 가득한 신음소리만이 공기 중으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세준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바닥을 뒹굴고 있는 세 명은 각자 맞은 부위를 붙들고 오만가지 죽상을 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 “셋 셀 동안 일어나서 일렬로 안 꿇으면 한 대씩 더 돌아간다. 하나, 둘…….”' 진정 빛의 속도라는 건 바로 이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 분명했다. 세 양아치의 황폐화된 몰골로 보아서는, 마냥 엄살을 피운 것만은 아닐 진데도 세준의 저 한마디에 다들 기겁을 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썹이 휘날리게 일어나 후다닥 한 줄로 꿇어앉았다. ' 유나는 저쪽 구석에서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파르르 떨면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옆으로 눈을 돌려 그녀의 잔뜩 겁먹은 모습을 확인한 세준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세 남자에게로 시선을 꽂았다. 만약 그를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지금 그가 취하고 있는 행동을 보았더라면 강세준 성격 참 많이 좋아졌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래의 그였더라면 이렇게 꿇어앉히기 전에, 이미 반병신은 만들어 놓았어야 정상이었다. ' 물론 지금껏 성격파탄자에 개차반 소리까지 들어 왔던 세준의 성질은 아직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딱히 저 양아치 세 녀석이 어린놈들이라 봐주려는 건 아니었다. 그는 결코 나이로 인해 아량을 베푸는 법이 없었다. ' 세준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건, 다름이 아니라 저쪽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그의 어린 아내 때문이었다. 평생 가장 예쁜 것, 좋은 것만 골라서 보여줘도 모자라는 그녀에게 지저분한 장면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가장 타격하기 손쉬운 안면 쪽은 오히려 건들지도 않고, 최대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법한 부분들로만 놈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지금은 상당히 분노했음에도 불구하고 손발이 나가려는 것을 자동적으로 자제하는 중이었다. 유나의 앞에서는 항상 성격순화, 언어순화하는 버릇이 이런 와중에서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 그의 발걸음이 빨간 머리 남자의 앞에서 멈추자, 잔뜩 긴장한 빨간 머리 남자는 꿇어앉은 무릎 위에 얹어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벌벌 떨었다.' “누가 시킨 짓이야.”'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음성이 섬뜩하게 들려 왔다. 시종일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어 보이는 세준의 얼굴은 마치 인조인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남자는 땅에 닿을 만치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뭇거렸다. ' “아, 그게……. 누, 누가 시킨 건 아니고요. 그냥 저희가…….”' “아직 덜 맞았나?”' “으윽, 사실은 혀, 현진욱이가 시켰습니다!”' 남자가 쩌렁쩌렁 내지른 소리와 동시에 세준의 시선이 저 먼 곳으로 돌아갔다. 그의 예리한 눈길은 건물 틈새에서 이쪽으로 막 다가서고 있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에게로 꽂혀 있었다. 의뢰를 받은 깡패들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있나 확인하러 온 진욱은 세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절할 것처럼 놀라, 그 자리에서 딱딱한 석상처럼 응고되어 버렸다. 고통을 꾸역꾸역 참아 가며 나란히 꿇어앉아 있는 세 남자와, 그 앞에서 싸늘한 얼굴로 서 있는 세준의 모습이 현재 벌어진 상황을 한 눈에 드러내고 있었다.' 현진욱. 세준이 어렴풋이 하고 있었던 예상이 맞아 들어갔다. 세준은 이 깡패들이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온 놈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학교 내에서도 이렇게 구석진데다가 인적이 드문 곳……. 더구나 유나의 마지막 수업이 있었던 강의실에서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장소를 딱 골라서 그들에게 접근했다는 건 분명 누군가가 시켜서 한 짓이었다.' 세준은 진욱을 향해 조용히 한 손을 까딱까딱 해 보였다. 순식간에 간이 콩알만 해져버린 진욱은 이 사태를 어찌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도망가려 한다면 잡힐 확률이 높았고, 아마 잡히면 죽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만약 도망에 성공한다 치더라도, 자신이 이 학교 학생임을 상대가 뻔히 알고 있는 이상은 언제고 다시 대면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앞에는 일렬로 꿇어앉아 있는 세 명의 인질들이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욱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덜덜덜 떨어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묶어 놓은 채, 세준은 옆쪽의 유나를 불렀다.' “이유나, 이리와.”' 유나가 화들짝 놀라 얼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빨간 머리 남자의 입에서 진욱의 이름이 나오고, 저 멀리서 진욱의 모습이 보였을 때부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혼란에 빠져 있었던 그녀였지만 그것보다도 지금 보이는 남편의 모습이 너무도 무서워서 그녀마저 행동이 빠릿빠릿해지고 있었다. 세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유나를 향해 차키를 내밀었다.' “……들어가 있어.”' “세준 씨, 하지만…….”' “가라고 했다.”' 유나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차키를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차가 주차된 쪽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떼었다. 가는 도중에도 무언가가 계속 걱정되는 건지, 중간에 몇 번씩 살짝 살짝 뒤를 돌아보기도 했으나 흡사 액자 안에 그려진 정물화처럼 상황은 여전히 정지되어 있었고 긴장 가득한 정적만이 그 사이를 타고 흐를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지고 나자, 순식간에 세준의 표정이 소름 끼치도록 일그러졌다.' “너도 빨리 꿇어 이 씹새끼야.”' 계속해서 침묵을 고수하던 그에게서 갑자기 들려온 섬뜩한 음성에, 진욱은 덜컥 놀라 번개같이 빨간 머리의 옆에 꿇어앉았다. 그의 척추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소름 돋는 느낌이 쫙 뻗어 나갔다. 아까까지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저 남자의 얼굴이 지금은 차마 상상도 못할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간이 뚝 떨어져 나갈 것처럼 두려워서 감히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한참 동안 덜덜덜 떨고 있는 진욱의 앞으로 다가간 세준이 천천히 쭈그려 앉더니, 그의 코앞에다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 “네 놈을……, 어떻게 해 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