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택이 반질반질하게 흐르는 복도 바닥과 10cm의 높은 하이힐 굽이 또각, 또각거리며 부딪히는 마찰소리가 한동안 주위를 울렸다. 그 소리가 어느 순간 멎었을 때. 그레이 톤의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한 미모의 여성이 잘록하게 빠진 허리에 한 손을 얹고,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서는 커다란 문 앞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 트윈케익 곱게 먹었고, 립스틱도 잘 발라졌고, 마스카라 가루 안 떨어졌고. 좋아, 화장 OK.'옷매무새도 괜찮고, 머리모양까지 모두 완벽해. 전부 다 OK, OK. 그럼 이제 심호흡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볼까?' 거울을 도로 넣고, 문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추켜세우는 경은의 얼굴에는 타고난 당당함이 넘쳐흘렀다. 미모, 집안, 학벌, 능력 중 어느 것도 빠지지 않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에, 27세의 나이로 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국내 정상급 기업 명인그룹의 사장 비서직까지 꿰어 차게 된 천운을 얻었으니 현재 그녀의 콧대와 프라이드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었다.' 경은은 비서실을 지나 사장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제 곧 만나게 될,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그 젊은 사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경은이 이렇게 승진하여 비서로 배정되기 전까지 사내에서 얼굴 한 번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무성한 소문에 의하면, 명인그룹의 대표이사 사장 강세준은 매혹적인 외모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든 반하게 만드는 엄청난 존재라고 했다. ' 대체 얼마나 잘생겼기에 다들 그렇게 혀를 내두르는 건지 경은은 언제나 궁금했다. 예전에는 그녀 만만치 않게 도도하고 콧대 높은 비서실 동료 김재희조차 사장을 한 번 본 뒤로 한동안 막강한 후유증을 동반한 상사병에 허덕이며 미쳐갔었고, 다른 여직원들도 사장을 보고난 후에 다른 남자들을 보게 되면 모두 눈코입만 달린 괴물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생기더라는 소리들을 늘어놓았었다.' 그 눈부신 외모뿐인가. 강세준 사장이라 하면, 명인그룹을 이끌어 가는 로열패밀리 강씨 일가 중에서도 가장 중심부에서 빛나는 인물이었다. 그는 현 그룹 총수의 외아들이라는 굉장한 백그라운드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명인그룹의 최대주주라는 위치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고 있었으며 그에 못지않게 천재적인 사업 감각과 경영 능력마저도 모두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 굉장한 분을 곁에서 모시게 되는 행운을 얻다니! ' 경은은 뿌듯한 마음으로 넓은 사장실 안을 쭉 걸어가다가, 안쪽의 가죽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깔끔한 블랙 슈트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멀리서 보아도 슬림 핏의 슈트를 매우 훌륭하게 소화해 내는 모델 같은 몸매에, 소파에 앉아있음에도 긴 다리가 눈에 딱 들어오는 멋진 신체비율의 남자. ' 오오……, 저 사람이 바로 사장이로구나. '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경은은 목을 몇 번 가다듬은 후 멋들어진 모양새로 엉덩이를 흔들면서 그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그녀의 보폭 큰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강력한 자석에 쇠붙이가 달라붙는 것처럼 구두가 바닥에 착 달라붙어 멈춰지고 말았다. 경은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짐과 동시에, 그녀의 숨이 뚝 멎어버렸다. 맹렬하게 뛰어 대던 맥박도 어느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해 있었다. ' 립스틱이 곱게 발린 경은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위로 벌어져 갔다. 세상에, 오 마이 갓! 경은은 그 자리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욕구를 엄청난 자제력으로 눌러버리고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부르르 떨며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더 자세히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경은보다 네 살이나 많은 서른한 살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진정 30대가 맞긴 한 걸까 싶을 정도로 고운 그의 피부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기미나 잡티 혹은 모공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샴푸를 쓰는 건지 까만 머릿결은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 찰랑거렸고, 간간이 깜빡이는 속눈썹은 남자치고는 상당히 길었다. 그리고 그 밑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조각 같은 콧대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색이 예쁘고 매력적인 입술까지……. 날카로운 냉미남의 시크한 분위기에 대기업 사장의 포스와 카리스마를 온몸에서 뿜어내고 있는 이 남자는, 정말 너무도 샤프하고 지적인 미남이었다. ' 외국의 명문대를 졸업한 경은은 나름대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지금껏 탄탄대로를 걸어왔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이제까지 만나 왔던 남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그중 잘생긴 남자들도 꽤 있었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 같은 미남은 살다 살다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간에 그 이상을 보게 될 거라는 재희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그 상태로 모든 신체리듬이 일시에 멈춰져 있던 경은은, 내내 손 안의 서류에만 시선을 던지던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하자 화들짝 놀라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가슴속에서 쿵! 하고 심장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경은은 그녀답지 않게 첫 인사에서 말을 더듬는 실수마저 범하고 말았다. ' “아,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이번에 새로 비서직을 맡게 된 백경은 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자, 잘……, 부탁드립니다.”' 으. 이 바보, 바보 백경은! 대체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게 뭐야.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할 거 아냐!' 경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사장을 바라보니, 아까는 분명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던 그가 어느새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린 채 짤막하게 입을 열고 있었다.' “강세준입니다.” ' 헉. 목소리……, 목소리! 완전 나이스. 만점이야! ' 또다시 저도 모르게 입술이 헤 벌어지며 우주 밖까지 가출하려는 정신줄을 겨우 붙들어 놓은 경은은 헛기침을 여러 번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경은이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면서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 매고 있음에도 앞의 사장은 그녀에게 한줌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간간이 서류만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싸늘하면서도 어색한 정적이 감돌자, 경은은 숨을 크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 그래. 눈앞의 저 미친 미모에 흔들리지 말자.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비서 백경은이야. 이정도 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경은이 입술 끝을 올리며 상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에도 사장의 시선은 서류의 글자에만 못 박은 듯 고정되어 있었다. 덕분에 경은은 웃는 표정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오늘 처음 왔다는데도 사람을 이렇게까지 개무시 할 수가 있는 건가? 흠. 친해지기 힘든 타입이라 이거군? 뭐, 상관없어. 사람 기분 맞추는 일은 도가 텄으니깐. ' “차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됐습니다.”' 경은이 생긋 눈웃음을 치며 물었음에도 되돌아오는 건 여전히 딱딱한 단답형의 대답이었다. 이쯤이면 사장에게 잔뜩 쫄아서, 혹은 무안해서라도 뒤돌아설 법도 하건만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할지 모를 상관과 최대한 빨리 친해지지 않는다면 고생길이 열리는 건 힘없는 약자에 지나지 않는 경은 쪽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은은 다시 억지로 미소를 띠운 채 살갑게 말을 붙였다.' “저……. 사장님,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 “저 이제 겨우 스물일곱이기도 하구, 사장님께서 제게 말씀을 높여서 하시면 오히려 제가 더 불편해져서요.”'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