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소류 씨. 좋은 아침.'“안녕하세요. 김남이 기자님.” '-이번 호 셀러브리티(celebrity) 이틀 만에 매진됐어요. 하하하 이게 다 관능적 연애 빨이 아닐까요?'“과찬이세요. 언제나 셀러브리티 덕을 보고 있는 건 저인 걸요. 우훗!”'-겸손하시긴, 요즘 고객엽서며 사이트며 소류 씨에 대한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고요. 필명이 중성적이다 보니 남자냐, 여자냐, 로 시작해서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미인인지, 혹은 미남인지, 아주 물음표들의 행진이라니까? 어때요 이쯤에서 인터뷰 한번 하는 게? 콜?'“물론 저야 화끈하게 콜을 때리고 싶지만 독자님들이 제 실체를 알면 무지 실망 할 텐데 괜찮겠어요?”'-흠……그건 또 곤란한데. 그럼 우리 멋들어진 가상의 인물 하나 만들어 볼까요? 멋진 미혼 남성작가 진소류 어떠신지?'“쿡쿡, 김남이 기자님. 지금 대놓고 사기 치자는 거죠?”'타닥, 타닥, 키보드 자판을 누르는 소리가 빈 사무실을 경쾌하게 울렸다. 우민은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 채 한 글자 한 글자를 말로 뱉어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일종의 버릇이었다. '-참! 소류 씨, 다음 호엔 연재분량 한 페이지 더 늘릴 수 있을까?'김남이 기자의 질문이 메신저 창에 채웠지만 우민은 대답 대신 바탕화면에 있는 인터넷 바로 가기를 더블 클릭했다. 긴 대화로 빼곡하던 메신저 창 위를 인터넷 포탈 사이트 창이 빠르게 뜨며 두 사람의 말없는 대화를 뒤 덮었다.'뚜벅, 뚜벅.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던 발자국 소리가 문 앞에 다다르자 우민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로 들어서는 사람을 맞이했다.'“오셨어요. 과장님.”'“좋은 아침, 우민 씨. 오늘도 출근이 빠르네. 젊은 사람이 아침잠도 없어?”'“호호, 술만 자제하시면 과장님도 저처럼 아침 형 인간이 되실 수 있으세요.”'“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술 끊으면 무슨 낙으로 살라고. 아이고, 피곤하다. 달달 한 커피 한잔 먹었음 딱 좋겠는데 말이야.”'“커피 한잔 타 드릴까요?”'“오오, 그래도 될까? 번거롭지 않겠어?”'“뭐, 제 것 타는 김에 같이 하는 건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역시 우민 씨는 서비스가 좋단 말이야. 요즘엔 여직원들에게 커피 심부름 같을 걸 시켰다간 자판기는 뒀다 뭐하냐고 되레 면박 주기 일쑤거든.”'그러니까 커피심부름 같은 걸 먼저 시키지 말아야지. 커피한잔 먹었음 딱 좋겠는데 라니, 그게 너 지금 당장 커피 타와 라고 말하는 거랑 대체 뭐가 달라? 라곤 차마 당당하게 말 못한 채, 우민은 김 과장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치며 분을 삭였다.'“호호, 그럴 땐 내가 콩 다방 커피 쏜다. 이러시면서 카드를 짠 내미시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될 텐데요?” '“어이, 마누라한테 맞아 죽을 일 있어? 한잔에 몇천 원씩이나 하는 커피를, 것도 여직원들까지 사줬다 하면 바로 도끼눈을 뜨고 달려들게 불 보듯 뻔한데.”'“그럼 몰래 숨겨 놓은 비상금을 쓰시면 되죠?”'“허허, 오늘 왜 그래 우민 씨. 난 비상금 같은 건 모르는 순진한 남자라고.” '마흔 넘은 남자가 스스로를 순진하다 칭하는 못 볼꼴을 보고 있으면서도 우민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9시 5분 전, 그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나지막한 여성의 중얼거림만 들리던 사무실은 이내 소란스러움과 여러 종류의 걸쭉한 목소리들로 한데 어우러졌다. 하나같이 단정한 정장차림의 넥타이족들이 네모난 상자를 연상시키는 사무실에 그득하니 차 있다. 입사 첫날부터 생각했지만 이 좁다란 사무실에 이런 인구밀도라니 정말 숨 막히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휴, 다행히 우리 팀엔 암내 나는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듯 우민은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저었다.'“참, 우민 씨, 오늘 부장님께 올릴 결재서류 정리 끝냈어?”'“네. 잠시만요.”'작업표시줄에서 주황빛으로 깜박이고 있는 창을 다시금 모니터 화면으로 띄우며 우민은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렸다.'-과장님 출근, 속속들이 넥타이족 입성. 중요한 일은 문자주세요. '-아, 그래요? 그럼 수고해요. 소류 씨.'-김남이 기자님도요.'이름 김우민. 나이 28살. '지극히 평범한 외모를 가진 주식회사 제일물산 기획팀의 2년 차 평사원. 대리로 승급할지 여부는 안타깝게도 아직 알 수 없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우민의 프로필이었다.'스물아홉을 코앞에 둔 겨울. 우민의 회사에 서식 중인 남자란 족속들은 대체로 그녀의 여자로서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너도 슬슬 한 물 갔다는 말을 원을 그리듯 빙 둘러 ‘우민 씨도 이제 슬슬 결혼할 때지 않아?’ 라고 그나마 순화해 말하는 종자들이 있는가 하면, 싸가지는 쓰레기통에 냅다 버리고 오셨는지. '‘어이 우민 씨! 완전히 맛 가기 전에 남자 하나 잡아서 후딱 시집가야지.’ 라고 성희롱으로 신고하고 싶을 정도로 막말을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인간들까지. '이런 팍팍한 주위 환경 속에서도 더럽고 치사해도 그놈의 돈이 뭔지 이 지긋지긋한 회사생활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 우민은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평범한 20대 여성이었지만, 동시에 패션 잡지 ‘셀러브리티’ 에 ‘진소류’ 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이중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그래. 독자들이 내 실체를 알아서 좋을 것 하나 없지.” '젊은 여성층에서 그런대로 인기소설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관능적 연애’ 의 작가가 아침 댓바람부터 찍소리 못하고 상사의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평범한 회사원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독자들은 당연히 실망하겠지? 하지만 그런 자신이기에 관능적 연애라는 소설 역시 탄생할 수 있었다고 우민은 생각했다. '김 과장에게 약속한 커피를 타기 위해 탕비실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우민의 등허리가 기역자로 굽었다. 출근하기 직전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기에 졸음이 눈꺼풀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지만 그녀는 한약처럼 쓰디쓴 믹스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곤 기지개를 폈다.'언제나와 같이 이어질 평범한 일상. '매끈매끈한 자갈돌처럼 자극 따윈 없는 평범한 일상.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일상. '“자, 그럼 오늘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긋지긋한 하루를 경쾌하게 시작해 볼까?”'''내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당신.'관능적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