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하얗고 깨끗해 보이는 피부와 딱 키스하면 좋을 것 같은 육감적인 입술과 오뚝하면서 날렵한 코, 그리고 깊으면서 장난기가 공존하는 듯한 까만 눈동자,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적당히 검은 눈썹. 한마디로 여자깨나 울리고 다닐 것 같은 준수한 외모였다. '‘어? 그런데 이 남자 내가 아는 누군가와 참 많이 닮았는데?’'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선우선진?”'“예. 선우선진입니다. 제 소개는 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아시죠? 강하늘 사장님?”'“응? 아, 예.”'“하긴, 매일 보는 얼굴인데 우리가 소개할 필요가 있겠니? 선우 실장이야 우리 하늘이가 매일 입에 칭찬을 달고 사는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그럼 우린 이만 빠져 줄게, 두 사람끼리 재밌는 시간 보내고 천천히 와. 그만갈래? 화영아?”'“그래, 선우선진, 엄마는 네가 원한대로 다 해 줬다. 지금부터는 네가 알아서 잘 해봐라. 믿는다. 아들.”'“걱정 마시고 두 분은 먼저 들어가십시오.”'자리에서 일어나는 양가 어머니들에게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정신없이 따라 일어나 그를 따라 인사를 하고 두 여자를 배웅했다. 기계적으로 자리에 앉아 멍한 얼굴로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 자리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숨 쉬시죠. 강하늘 사장님. 그러시다 결혼도 못해보고 가겠습니다.”'“……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야?”'“맞선보는 남자 이름 정도는 알고 나가시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분명히 어머님이 사장님께 브리핑 하셨을 텐데요?”'그랬다. 어제 저녁 엄마가 내 침대 머리에 앉아 오늘 맞선을 볼 남자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브리핑을 했었다. 뭐라고 하셨더라? 지림 제지의 둘째 아들이고 나보다 한 살 어리다고 했었나? 키는 엄마의 이상형인 184센티미터에 잘생겼다고 했던가? 프린스턴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3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했던가? 어머니가 말씀하신 모든 것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정작 남자의 이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선우선진이 내가 맞선을 볼 상대라는 것을 알았다면 오늘 이 자리는 엄마가 잡아끌고 와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어떤 사장이 자신의 부하직원, 그것도 자신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비서와 맞선을 보겠는가? 내 비서실에서 근무한 지 벌써 3년째였다. 아버지 비서였던 박 비서실장이 그만두시고 난 뒤 공개채용 했던 능력 있고 스펙이 뛰어난 남자, 그러면서 이미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남자. 그가 바로 선우선진이었다.'“그럼 선진 씨는 알고 나온 거야?”'“물론입니다. 전 사장님과 달라서 맞선녀의 이름도 모르고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물론 이젠 아시겠지만 이 맞선 제가 배후조종해서 이루어진 제 작품입니다.”'“하!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네. 이봐요! 선우선진 비서실장님! 바보가 아니면 자신의 상관과 맞선보는 남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어?”'“그건 그렇겠죠? 그렇지만 세상에 저 같이 사람이 한 명쯤 있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만.”'“뭐? 솔직히 말해 봐. 그동안 내가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인 거지? 남자인 선우선진에게 생리대 심부름에 스타킹 심부름까지 시켜대는 사장에게 한번 어퍼컷이라도 날리고 싶어서. 그렇지?”'“아뇨. 물론 생리대 심부름을 좀 심하긴 했지만 덕분에 난 강하늘이라는 여자의 생체리듬까지 한눈에 꿸 수 있어 괜찮았는데. 혹시 눈치 못 챘습니까? 요즈음은 미리 생리대까지 준비해 뒀다가 때가 되면 사장님 책상 안에 넣어 둔다는 것.”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항상 몽에 신호가 와서 서랍을 열어보면 항상 내가 사용하는 제품이 떡하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을 그가 미리 준비해 뒀다는 것을 왜 몰랐는지. 아무리 바빠서 정신없이 살고 있긴 해도 사용해도 끊임없이 나오는 화수분처럼 계속 비치가 되어 있었던 것을 의심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 오는 바람에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내게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지난 3년을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강하늘이라는 여자 꽤 매력 있는 여자고 가지고 싶은 여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서 양가 어른들을 움직인 겁니다.”'“선우선진 씨!”'“물론 맞선형식이 아닌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방법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워낙 사장님이 나란 남자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쇼크를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사귀자고 했다면 뺨을 올려붙이고 끝내 버릴 것이 뻔해서…….”'그의 말이 전부 옳았다. 그가 내게 평범한 방법으로 접근을 해 왔더라면 난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그를 해고시키거나 그도 아니면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 버리고 웃어 넘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나란 여자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엄마를 통한 맞선 남으로 만나면 싫어도 일정기간 동안 데이트를 한 후 그 결과를 보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까지 계산하고 시작한 것이었다.'“도대체. 왜 나와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왜라니요? 남자 여자에게 작업을 할 때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서.”'“선우선진 씨!”'“사장님 시간이 늦어 배도 고프실 텐데 우리 식사나 하면서 대화를 계속하시죠?”'“뭐? 지금 밥이 입에 넘어갈 것 같아?”'“예. 사장님은 허기지면 신경질적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단은 배부터 채우고 얘기하죠.”'“하!”'능글스럽게 잘생긴 얼굴이 미소까지 지으면서 종업원을 불러 내가 좋아하는 해물 파스타를 시키는 선진을 보며 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남자가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선우선진이라는 남자는 절대 함부로 속내를 내어 놓는 남자가 아니었다. 지난 3년을 같이 일하면서 그가 나를 실망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철두철미하고 계획적이고 능력 있는 남자였다.'내가 내린 지시사항은 반드시 관철시키고 말았고 자신이 판단할 때 아니라고 판단되면 아무리 내가 우겨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내게 그는 참모요, 비서요, 술친구였다. 그런 그가 나를 상대로 다른 생각을 품었다는 것은 심심해서 한번 해보자는 식의 가벼운 행동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그런데 그것이 난 두려웠다. 한번 결단을 내리면 꼭 이루고야 마는 저 남자가 나를 가지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는 사실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선우선진과 내가 남자와 여자가 된다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너무나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싶지 않은 부하 직원과 연인으로 얽히는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나 먼저 갈 테니 혼자 먹고 와. 그리고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 그리 알아. 난 선우선진 씨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내 소중한 부하직원을 잃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사랑이든, 욕망이든 정리하고 내일부터는 오늘 이 자리 이전의 선진으로 돌아오기를 바랄게.”'그가 내 말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며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고 일어섰다. '“그냥 당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해. 내가 당신에게 갈 테니. 내게 이미 강하늘이라는 여자는 더 이상 내 상관이기만 한 여자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내게 오늘 이 순간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 따위는 하지 마. 내겐 너무나 뜻 깊은 오늘이 당신에게는 쇼크였을 테니 당신의 비서로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줄게.”'그리고 그는 멍하니 서 있는 내 손을 확 잡아끌고는 레스토랑을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