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곧 이륙을 한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안전벨트 사인에 불이 들어왔다. 거대한 몸체의 비행기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로라의 꽉 쥔 주먹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구우웅 하는 무거운 떨림과 함께 그녀의 귀가 멍멍해지기 시작했다. 커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은 빈속은 이미 울렁거리며 요동쳤다. 활주로 위를 무섭게 내달리던 기체는 어느 순간 로라의 혼을 전부 빼 버리며 공중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후우우.”'로라는 참았던 숨을 길게 뱉어 내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어떤 이는 이륙 순간에 느껴지는 짜릿한 설렘 때문에 비행기를 타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로라는 그 순간이 너무도 끔찍했다.'역마살이 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중학교 교사라는 직업 덕분에 방학을 활용할 수 있었고, 로라는 기회만 되면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그렇게 살아온 지 어언 6년이 지났건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하는 비행은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인 여행에 걸림돌이 되어 갔다.'‘으으, 미치겠네. 이 상태로 어떻게 일곱 시간을 버티지.’'로라는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가루다 인도네시아항공 기내를 슬쩍 둘러보았다. '여타 항공기의 비즈니스 석에 비하면 조금 허술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른 항공의 이코노미 석과 비슷한 가격으로 넓은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은 제법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겨우 안정을 찾은 로라는 문득 옆에 앉은 사람에게로 관심이 쏠렸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누가 앉아 있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설령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꽃미남 군이 앉아 있다 해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만큼 로라의 비행공포증은 중증에 달하고 있었다.'로라는 기내를 둘러보는 척하며 슬며시 통로 쪽 옆자리의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머리엔 헤드폰을 끼고 비스듬히 누운 채 잠이 든 남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오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피부는 그녀의 것보다 훨씬 하얗고 깨끗해 보였으며, 속눈썹은 숱이 많은 담갈색이었다. 속눈썹과 같은 색의 머리는 자연스럽게 웨이브 진 상태로 어깨 언저리까지 닿아 있었고, 살짝 보이는 귓불엔 심플한 디자인의 링 귀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비즈니스 석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자리가 좁게 느껴지는 긴 다리가 아니었다면 그를 여자로 착각했을지 모를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순간, 아무 기척도 없던 그가 느닷없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던 로라는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갑작스레 고개를 돌리기도 뭣해,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보다 더 상냥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그쪽에게 관심 없으니 얼굴 좀 돌려주겠어?」'그의 입에서 나온 언어는 English! 영어였다. '어이가 없어진 로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가 가볍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전보다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곧, 묘하게 섹시한 그의 입술 사이로 이번엔 유창한 일본어가, 적당히 낮은 목소리로 듣기 좋게 흘러나왔다. '《상냥하게 말해 주니 좋은가? 착각하지 마. 여자는, 특히 당신 같은 여자는 딱 질색이니까 다신 쳐다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재수 없거든.》'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의 표정이 유독 온나(おんな—여자)라는 단어를 말할 땐 슬쩍 일그러지는 모습이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분명 그가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었다. 보이는 분위기와는 달리 엄청나게 살벌한 내용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라는 화가 난다기보다 기가 막혔다. 그를 책망하기보다는 잠깐 동안 눈앞의 잘난 외모에 혹해서 멍청히 쳐다보고 있던 자신이 실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주 잠시 고민을 하던 로라는 그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네. 반가워요.”'그녀는 일부러 또박또박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언뜻 그의 한쪽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은 분명 비웃고 있는 것이리라.'‘하, 제대로 무시를 당하고 말았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뭐지? 반반한 얼굴 덕분에 꽤나 왕자 취급 받으면서 살았나 본데, 나야말로 너 재수 없거든!’'로라는 억울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녀에게 영어는 자면서 잠꼬대로 할 만큼 우리말 다음으로 익숙한 언어였다.'어릴 때부터 어문계열에 점수가 높았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영문과에 진학했고, 무난한 직장을 얻기 위해 임용고시를 본 뒤 영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꼬박꼬박 해외연수를 다녀온 그녀였다. 게다가…….'‘일본드라마를 10년 이상 봐 온 나야. 일부러 어학원에 가서 공부까지 한 나라고! 아주 제대로 밥맛없는 놈이네.’'아예 대놓고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가며 무안을 주려다 그냥 관둬 버렸다. 얼굴 붉히고 싸워 봐야 좋든 싫든 일곱 시간은 나란히 앉아서 가야 할 테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음료수와 먹을 것들을 가져다주었다. 치즈와 연어샐러드, 몇 가지 종류의 과일과 견과류 등이 주스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그다지 식욕은 없었지만, 갑작스레 밀려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로라는 그것들을 정신없이 입속으로 집어넣었다.''간식을 먹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온 식사까지 모두 먹어 치운 로라는 덕분에 식곤증이 밀려와 꽤 오랫동안 단잠에 취해 있었다. 뭔가 몸이 붕붕 나는 듯한 느낌이 들기 전까지는.'불길한 예감에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안전벨트 사인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것은 즉, 위험한 상태이니 쥐 죽은 듯이 앉아 있으란 신호가 아닌가! '로라가 심하게 불안해하고 있을 때, 그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몇 분간 기류 변화로 인해 기체가 조금 흔들릴 수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을 위해 좌석으로 돌아가셔서 안전벨트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오 마이 갓! 기장의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비행기는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태어나서 딱 한번 타 봤던 놀이동산의 바이킹, 그 끔찍한 경험의 열 배도 넘는 공포가 몰려오고 있었다.'‘안 돼,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아악!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단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그것들에게 제대로 보여 줘야만 해. 내가 답답하고 꽉 막힌 여자가 아니란 걸 보여 줘야 한단 말이야!’ '로라는 무릎에 덮여 있는 담요를 주먹으로 힘껏 움켜쥐며 얼마 전 있었던 최악의 회식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