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성 대학 병원 내과 4년 차 정훈은 좀처럼 올 일이 없는 신관 승강기 앞에 섰다. 8층 이사장실, 층별 안내판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왜, 하필 오늘 휴가를 내신다고 해서…….’

논문을 준비하는 박 교수님을 대신해 이사장에게 논문에 관해 설명하러 온 정훈의 얼굴이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관에 오기 전 외래 간호사를 통해 병원 이사장이 ‘조카사위’를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를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겠지?’

내과 김 교수님을 도와 초기 자궁암으로 VIP 병동에 입원했던 이사장을 살피며 친분을 쌓긴 했지만, 자신은 생판 모르는 여자하고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또한, 일생 중 꼭 병원장을 해보고 싶다는 명예욕 또한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과 안팎으로 자신이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다 알려진 판에 다른 여자하고 결혼한다? 어불성설이었다.

‘아, 너무 앞서 나가지 말자. 이사장님은 정말로 논문 설명을 듣고 싶어서 부른 것일 수도 있으니까.’

정훈은 힐끔 손에 든 자료를 훔쳐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얼마 후 이사장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어서 와요. 한 선생.”

책상에서 서류를 보던 이사장이 여성 특유의 경쾌한 목소리로 정훈을 맞이했다.

“또 뵙습니다, 이사장님.”

정훈이 공손히 인사를 하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또 보네요. 또 봐요. 그래도 VIP 병동에서 보는 거 하고, 이사장실에서 보는 거 하고는 아주 다르지 않아요? 오랜만에 내 전투복인 정장도 입었는데 말이에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이사장이 몹시 뿌듯한 눈길로 자신의 정장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미소에 정훈 또한 웃으며 대꾸했다.

“아주 많이 다릅니다. 퇴원! 축하드립니다, 이사장님.”

“어휴! 축하는 무슨 축하를 해요. 이제 겨우 2차 항암 치료만 마쳤을 뿐인데요. 그래도 축하 인사! 고마워요, 한 선생!”

정훈의 축하 인사가 싫지만은 않았는지 남세스럽다 듯 손사래를 치던 이사장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정훈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아차차. 내 정신하고는! 박 교수님 논문에 관해 듣기로 해놓고서는! 미안해요, 한 선생. 앉아요. 앉아. 얼른 차 준비시킬게요.”

“아, 아닙니다, 이사장님.”

정훈이 곧장 이사장이 권하는 소파로 가 봉투 속 서류를 상석에 앉을 이사장 자리에 놓았다.

“아, 이거예요?”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긴 이사장은 정훈이 꺼내 놓은 서류를 집어 들곤, 상석이 아닌 정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았다. 그 모습에 정훈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마……, 아니겠지?’

“아, 역시 어려운 논문이네요.”

서류를 대충 훑어본 이사장이 웃었다. 그 웃음에 어색한 눈웃음으로 응수하던 그는 곧 논문에 관해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이번 논문은.”

똑똑.

“아, 잠시만요.”

노크 소리에 이사장은 정훈의 입을 막더니 들고 있던 서류는 보란 듯이 테이블 한쪽 구석에 놓아 버렸다. 그런 이사장의 행동에 정훈의 목구멍에서는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비서가 두 사람 사이에 차를 놓고 나가자, 이사장은 웃는 얼굴로 그에게 차를 권했다.

“차 들어요. 한 선생.”

“아, 네. 이사장님.”

정훈은 짧은 묵례를 하고 차를 들었지만, 아무래도 이사장이 자신의 조카 이야기를 꺼낼 듯싶어, 차 한 모금을 넘기며 빠져나갈 핑곗거리를 고민했다. 하지만 찻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마주한 이사장의 당당한 시선을 보곤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방법이 없다, 방법이! 그러면 정면 돌파밖에…….’

정훈은 전투에 임하는 군인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 정훈의 태도 변화를 기다렸는지 이사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정훈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그 이유를 아시죠?”

역시나 VIP 병동에서 대화를 나누면 느꼈던 대로 저돌적이었다. 그러나 정훈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담담히 말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슨 이유로 저를 이곳에 부르신 것인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짐작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 그의 말을 따라하던 이 사장의 눈동자가 정훈과 마주치자 따스함으로 반짝였다.

“다행이네요. 이 정도의 눈치는 있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