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합본] 프라이빗 하우스(Private House) (3부/전2권)



#88. 행복 뒤에 따라오는 것

 

 

 

살금살금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발놀림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지하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서준의 뒷모습을 발견한 우리는 서준의 뒤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조심스러운 발놀림과 달리 우리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넘쳤다. 서준이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우리는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서준을 놀래켜 줄 생각에 새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1부터 30까지의 숫자가 카운트되었다.

오늘도 서준의 선택은 히어로 무비였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영화고, 대사도 외우고 있지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울할 때나.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반복해서 볼 영화였다. 피규어를 옆자리에 놓고 보던 때와 달리 오늘은 온전히 혼자였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편 채 편안한 자세를 취했지만,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승원과 우리의 다정한 모습이 서준의 맘에 들어 앉아 괴롭혔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어느 때고 저도 모르게 우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옆에는 승원이가 있었다. 마음 정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서랍 정리하듯 정리정돈이 단번에 된다면 그게 어디 마음일까.

마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속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출발을 알리는 깃발이 떨어지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나가려는 레이싱카처럼. 사나운 짐승을 우리에 가둬 놓은 것처럼….

진심으로 축하가 되지 않는 자신의 이런 맘을 생각도 못할 두 사람에게 미안해서 서준은 두 사람에게서 한 발 떨어져 있기를 자처했다. 그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언제나 위로가 되어 주던 영화 속 히어로들도 요즘 들어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불현듯 귓가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흐어억! 소스라치게 놀란 서준이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기겁한 얼굴로 돌아보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우리가 큭큭 웃으며 의자를 돌아 앞으로 걸어왔다.

와, 표정 봐. 귀신 본 거 같아요.”

“귀신 본 것보다 더 놀랐어요. 아후… 심장이야….”

서준은 벌떡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쓸쓸한 뒷모습이 보이길래, 안 따올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는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옆의 의자에 앉았다.

“필요한 게 있어 보이기도 하고.”

“내가 필요한 게 뭐가 있더라….”

놀란 맘을 진정시킨 서준이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앉았다.

“친구요.”

서준이 우리를 쳐다봤다. 찔끔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

턱받침을 하고 본인을 강조하는 우리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혼자라서 쓸쓸했던 것도 맞고, 온기를 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한 것이 맞았다. 우리의 등장과 동시에 영화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영화 볼륨 때문에 우리와 서준은 몸을 당겨서 거리를 좁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영화도 안 보고, 사람이 옆에 오는 것도 몰라요?”

아, 연애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요.”

푸념하듯 말한 서준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서준 씨 인기 많다면서요. 얼마든지 연애할 수 있지 않아요?”

“그렇다고 아무나 만날 수 없잖아요. 내가 원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안 그러냐는 듯 동의를 구하는 서준의 시선에 우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있어요? 있구나! 그래서 뒷모습이 쓸쓸했구나? 그죠?”

급속도로 올라가는 흥분지수만큼이나 우리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즉각적으로 오는 우리의 반응이 재밌으면서도 서준의 맘 한구석에 씁쓸함이 진하게 올라왔다.

우리는 아예 서준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한서준이 좋아하는 여자라니. 대박사건이다!

“서준 씨 맘 그 여자 분도 알아요?”

서준이 우리를 가만히 보았다. 왜 본인이 들떴을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서준이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상상도 못 하는 거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거.”

일순간 우리의 표정이 안타깝게 구겨졌다.

“말 안 했어요?”

“네.”

순간 우리의 손이 서준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야! 아프기보다는 놀라서 소리가 터졌다. 맞은 팔을 손으로 꾹 누른 서준은 황당하게 우리를 보았다. 나 왜 맞은 거지? 울고 싶은 놈한테 매질이라니. 억울하지 않은가!

“말을 해야 알죠. 왜 말을 안 해요. 여자들은 애매한 거 싫어해요. 나 너 좋다! 확실하게 말해줘야 한다구요.”

답답한 안타까움에 우리가 핏대를 세웠다. 정말 상상도 못 하는구나….

“했어야 했나.”

“했어야죠. 그러니까 상상도 못 하는 거죠. 으휴… 티라도 팍팍 좀 내지.”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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