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양강장제
환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새론은 영원할 것만 같은 소녀미를 장착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빠트린 것은 없는지 병실을 한 번 쭈욱 둘러보았다. 곧 세탁물 더미에 쌓일 이불이지만 이불정리까지 말끔히 되어 있었고, 소파 의자에 종이가방 하나, 배낭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얼른 퇴원 수속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쉬고 있어.”
우리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밖에서도 문을 열었는지 문이 튕기듯 열렸다. 들어오려던 누군가와 부딪칠 뻔한 순간, 놀란 우리는 잽싸게 몸을 뒤로 빼면서 피했다.
아싸, 피했다! …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누구였던가. 남다른 힘은 있을지언정, 남다른 운동신경은 없는 몸뚱아리의 소유자인 탓에 바람보다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고 느낀 건, 두뇌가 일으킨 착각. 현실은 손바닥치기 하듯, 다리는 제자리에 박힌 채 상체만 뒤로 휘어버렸다. 어어! 양팔을 퍼덕거려도 추락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운동신경이 뛰어난데다가 우리가 넘어지는 꼴은 못 보는 누군가의 듬직한 손이 뒤로 넘어가는 우리의 등을 민첩하게 받쳤다.
순간, 시트러스 향이 우리를 덮었다.
“조심 좀 하십시오.”
듣기 좋은 승원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우리의 시선에 어! 놀라는 시선에 승원이, 그리고 뒤에 있었던 새론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장면을 연상케 하는 고혹적인 자세가 우리로 하여금 고혹과 코믹의 중간에 걸려 있게 만들었다.
어흑… 목과 허리가 아파왔다. 승원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우리가 다치지 않도록 바로 세워주고는 떨어졌다.
“강승원 씨 나이스샷!”
우리는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민망함을 천연덕스럽게 무마시켰다.
“퇴원수속은 끝냈습니다.”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우리가 새론이와 승원을 번갈아 보았다. 승원은 출근을 해야 했기에 우리가 새론을 퇴원시키기로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중간에 왔다는 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새론이 걱정돼서 왔구나. 그죠?”
능청맞게 승원의 정곡을 찔렀다. 모르면 알게 하라. 승원과 새론 남매 사이에서 우리가 스스로 부여한 임무였다.
“오빠가 좋긴 좋네.”
승원은 쑥스러운 듯이 대꾸 없이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 놓인 짐이 눈에 띄었다.
“짐은. 이겁니까?”
겨우 이런 걸로 말을 돌리며 쑥스러워 하는 게 우리 눈엔 귀여웠다. 승원은 가끔 이렇게 반전을 보여준다. 오만하리만치 자신만만하다가 여리고, 뻔뻔하다가도 수줍고, 얼음처럼 차갑다가 불꽃처럼 뜨겁다.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들어가 지금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갑시다.”
짐을 챙겨든 승원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문을 열고 기다렸다. 다른 때라면 먼저 가버렸을 승원이의 작지만 큰 변화였다.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막상 결심하면 바뀌려고 최선을 다하는 승원이가 참 좋았다.
우리가 새론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병실 문을 닫고 이동하려는 때에 세 사람은 맞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고 닥터와 마주쳤다.
“자칫하면 못 볼 뻔했군요.”
“바쁘신데 일부러 와주신 거예요? 선생님 멋지십니다.”
우리가 존경의 쌍엄지를 선사했다. 가볍게 웃은 고 닥터는 승원과 새론을 보며 인자하면서도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밥은 챙겨 먹을 것. 스트레스 받는다고 몸을 혹사시키면 둘 다 불러서 혼낼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
“제가 먼저 혼구녕 내줄게요, 선생님. 저만 믿으세요.”
우리가 고 닥터의 말을 받아 주먹까지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우리 씨만 믿어요.”
흡족한 미소로 우리의 말을 받은 고 닥터는 승원을 따뜻하게 보며 주의 깊게 말했다.
“승원이 넌, 증인이 필요하면 꼭 나한테 말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문을 몰라 승원이 되물었다
“법적보호자 변경 한다면서요? 승원이 네가 새론이의 진짜 보호자라는 걸 증명하는데 내 증언이 결정적일 거예요.”
어떻게 알았는지 고 닥터는 소송시 필요할지도 모를 증언에 대해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밀이 없는 것인지, 고 닥터에게 남다른 정보망이 있는 것이지 알 수는 없지만, 승원의 결정을 지지하는 고 닥터의 말은 무척 든든했다.
“고맙습니다.”
“잘들 가고… 정기 검진 때 말고는 되도록 보지 맙시다.”
의사 얼굴 자주 봐야 좋을 것 없다는 평소의 주장을 인사로 남긴 고 닥터는 손을 들어보이고는 쌩하니 곁을 지나쳐 갔다. 저만치 가서야 고 닥터는 뒤를 돌아보았다. 승원과 새론,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챙기며 가는 모습이 정겨웠다.
“산이가 보면 좋아하겠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