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자신의 동네와는 달리 시끌벅적한 자동차 경적소리에,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재잘거림. 늘상 느끼던 고요함이 아닌 다른 환경이었다. 구불구불 걸어올라 가던 길이 아닌 포장도로를 걸어 커다란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 쯤, 세영은 자신의 이마를 톡 쳤다. '“아, 멍청이.”'그러고 보니 집 비밀번호를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다. 분명 전화를 하면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왜 혼자 왔냐고 물어볼게 뻔하고. 그렇다고 아이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덧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집에는 왜 간 걸까. 아니 그것보다도 언제쯤 오려나. 가방을 잠시 복도바닥에 내려놓고 문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문이 열릴 리가 있나. 한숨을 내쉬며 비밀번호를 차근차근 눌러보았다. 자릿수라도 알면 좋으련만, 분명 도혁이 비밀번호를 누를 때 보긴 했는데 기억이 도통 나지가 않는다. 결국 4자리부터 시작해 6자리까지 뭔가 그가 입력할만한 번호들을 눌러보았지만 아무리해도 ‘삐삐’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올 뿐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가 않았다. '몇 번을 누르다 괜히 이웃들에게 민폐라도 끼치는 건 아닐까싶어 세영은 벽에 스르르 내려앉아 바닥위에 털썩 앉아버렸다. 양 무릎을 손으로 감싸안고 결국 그녀는 도혁에게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갈게.]'조용히 앉아있자니 자꾸만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고, 잠이 쏟아져 내렸다.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고 막 잠이 들려던 찰나, 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도혁아, 있지. 나 너희 집이다.”'[집이라니 오피스텔?]'“응.”'[거길 왜 벌써 갔어. 데리러 간다니까.]'“기다리는데 니가 하도 안 오길래 그냥 운동도 할겸 혼자 왔어. 집에서 볼 일은 다 끝났고?”'[어. 지금 막 차에 탔어.]'“그럼 금방 오겠네? 참, 도혁아 있지. 근데 여기 비밀번호가 뭐야?”'[0000.]'“아 000···자, 잠깐만, 뭐?”'[0000.]'“아, 뭐야 그렇게 쉬운 거였어?”'비밀번호를 듣는 순간 허탈감에 휩싸였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원래 대부분 비밀번호가 처음엔 1111 아니면 0000으로 많이 시작하는데 그런 기본적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니. '[왜?]'“아, 아무것도 아냐! 얼른 와 그럼. 끊을게.”'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문 앞에 서있었다. 아니 비밀번호를 새로 하고 바꾸지도 않아? 괜히 도혁 탓을 하다가도 이내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져서 축 늘어진 팔로 네 자리 숫자를 눌러보았다. ‘띠리릭’ 문이 열리자 허탈감은 극도로 치솟아 올랐다. '“하.”'허공에 대고 허탈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고, 일단 옷부터 갈아입었다. 감기 기운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그런가 몸도 좀 피곤한 게 샤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그동안 간만에 뜨거운 물에 목욕이나 할까. 마치 자신의 집이었던 냥 익숙하게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와 화장실 불을 켰다.'샤워부스를 틀자 몸이 시릴만큼 차가운 물이 나오다가 금세 따뜻한 물로 바뀌었다. '도혁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는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세영을 마주했다. 샤워라도 하고 나오는 건지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서 수건으로 말리는 세영을 바라보며 도혁은 구두를 벗고 실내로 들어섰다. '“아, 왔어?”'“씻었어?”'“응. 갑갑해서 샤워 좀 했어. 근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내가 너무 오래있었나?”'물기를 짜내고 수건으로 긴 머리카락들을 털면서 밖으로 나온 세영은 습기 찬 얼굴을 털어내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뒤로 모락모락 김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감기 걸렸을 때 샤워하면 안 된다는 거 몰라. 머리 다 말리고 자.”'“알겠어. 근데 여기 드라이기 있나?”'도혁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왔다.'“책상위에 올려놨어.”'“고마워.”'그가 옷을 갈아입으러 다른 방으로 들어가고, 세영은 침대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올려진 새 드라이기를 발견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언제 또 거울은 꺼내놓은 건지, 그의 세심한 배려에 풉, 웃음이 새어나왔다. 콘센트를 꽂고 버튼을 올리자 조용했던 방 안에 작은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개 숙여 뿌리부터 찬찬히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가며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세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편안한 츄리닝으로 옷을 갈아입은 도혁이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머리 말리는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세영은 잠시 버튼을 끄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거기서?”'“그냥.”'이런 걸 처음보나, 그래 처음 보겠지. 뭐가 그리 신기한지 거울 속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시선이 마주치자 왠지 민망해졌다. 결국 머리를 채 말리지 못한 세영은 다시 드라이기를 끄고는 그를 향해 물었다.'“남자들은 금방 말리지만 여자들은 머리가 길어서 오래 걸리거든.”'그러자 가만 서있던 그는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도혁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세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엉뚱한 물음을 내던졌다. '“나도 말려 봐도 돼?”'“응?”'“신기하네. 금방 마를 것 같은데 안 마르는 게.”'그의 엉뚱한 질문에 세영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미소 지었다.'“뭐······그래. 말려 봐.”'뒤로 다가온 도혁이 세영에게 드라이기를 건네받았다. 어릴 때 엄마가 종종 머리를 말려준 적은 있었지만 남자가 머리를 말려준다는 건 또 처음이다. 어색하게 드라이기를 건네주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서있는 도혁의 단단한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적막이 흘렀다. 작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둘 뿐이고,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드는 고요함은 긴장감을 더욱 극대화 시키고 있었다. '‘지잉.’'드라이기를 건네받은 도혁이 버튼을 누르고 덜 말라 아직도 촉촉하게 젖어있는 세영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따뜻한 바람으로 천천히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이 살짝이라도 스쳐지나가는 곳은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머리를 말리는데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라 어떤 곳을, 어디를 말리는지. 그의 손길이 닿는 곳이 어딘지 거울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있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단단한 팔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좋네.”'이내 도혁의 잔잔한 음성이 방 안 가득 조용히 울려 퍼졌다.'“응?”'“나한테서 나는 냄새가 너한테도 나.”'“그야 너희 집 물건을 썼으니까.”'“좋다, 이거.”'머리카락을 촤르르 흩뿌리며 도혁은 어디 유명 미용실에 미용사라도 된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촉촉이 젖어있던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말라가는 모습을 보며 신기한 듯 알 수 없는 표정들을 지었다. '“나도 좋다. 누군가가 머리 말려주는 거 되게 오랜만이거든.”'“기분······좋은건가?”'“응, 좋아. 뭔가 나른해지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