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에 꼽힐 정도의 대기업 재벌들만이 거주한다던 모 동네의 으리으리한 대저택. 일찍 일어나 개운하게 샤워를 끝마치고, 옷장문을 열었다. 한 번에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가지런히 잘 다려진 와이셔츠들. 그 중 세 번째에 걸려있던 셔츠를 꺼내 입자 탄탄하고 다부진 몸매가 한순간 눈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평소 습관대로 윗 단추 한 개를 풀러놓고,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셔츠 단추를 잠가 나갔다. 답답해서 잘 매지 않던 넥타이 또한 능숙한 솜씨로 메고는 서랍을 열어 빛나는 은색시계를 꺼내 손목에 찼다.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며 바지와 세트인 검은색 정장 마이를 몸에 걸치며 도혁은 방문을 나섰다.'“기다리고 있었습니다.”'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자 미리 대기되어있던 검은색 승용차에서 단정한 차림의 남자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말없이 뒷좌석에 탑승하고 나자 서있던 남자도 운전석으로 와서 차 문을 열고 탔다. 백미러로 힐끔 보며 도혁의 얼굴을 본 남자는 역시나 소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대영그룹 회장의 외동아들 이도혁. 대학교 졸업 후 미국에서 5년간의 연수를 끝마치고 이제 막 돌아온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다음부터는.”'힐끔힐끔 백미러로 바라보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리고 있던 도혁이 백미러 속 사내의 눈을 마주하며 말을 건넸다. 차가운 냉기가 흘러넘치는 낮은 보이스에 사내는 흠칫 놀랐다.'“내가 직접 운전하고 다닐거니까 이렇게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예? 아, 네.”'회사로 가는 내내 차 안에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건지 창밖을 바라보는 도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회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그를 맞이하러 나온 남자가 있었다. 박세호. 대영그룹의 비서실장이자, 도혁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인 이석곤 회장의 비서역할을 하던 인물. 게다가 미국에서 연수를 받을 무렵, 그의 도움을 종종 받곤 했다.'“오셨습니까, 실장님.”'고개를 끄덕이고 도혁이 먼저 회사안으로 들어가자 뒤이어 세호가 그의 뒤를 따랐다. 대한민국에서 모 유명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약 3년간의 연수를 거쳐, 미국지사로 들어가 2년간 좋은 실적을 내고 돌아왔다. 어쩌면 회장인 석곤보다 더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을지도 모를 위인으로 보이는 도혁의 등장에 회사 내에서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각 부서별로 대영의 외동아들이자 인물좋고, 능력좋은 남자가 오늘 입사한다는 소식이 쫘악 퍼져있던 상태였다.'“이곳이 바로 오늘부터 실장님께서 근무하실 곳입니다.”'세호의 안내를 받아 도혁이 안으로 들어가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하나같이 고개숙여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실장님.”'고개만 까딱이고는 그대로 실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봤어? 진짜 소문대로네?”'“그치 내말이 맞지? 거봐 정말 잘생기고 완전 능력도 좋다니까? 이번에 미국지사에서 업계 최고 1위 실적인가 뭔가 하여튼 대단한 뭘 했다는데 장난 아니래.”'“몸매 봤어? 어우 죽이더라.”'여사원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는 실장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잠잠해졌다. 실장 이도혁이라는 명패를 한번 바라보고 도혁은 그대로 마련되어 있던 책상에 앉았다. 이곳이 앞으로 그가 일할 회사이자,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박 비서님도 굳이 이렇게 나와 있을 필요는 없었는데 감사합니다.”'자리에 앉아 양 손에 깍지를 껴고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기 전에 청소라도 해놓은 건지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다.'“회장님은 뵈셨나요?”'“아뇨. 있다가 올라가 볼 겁니다. 참 그리고 제가 연락드렸던 건 어떻게 됐습니까.”'“아,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도혁의 말에 세호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에서 종이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제일 위에 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도혁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쓰여있는 글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지금은 그냥 작은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고, 전에 살던 곳에서 이사를 가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별로 특이한 사항은 없는 거 같고, 나머지는 실장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세호의 말을 들으며 도혁의 얼굴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한세영. '사진 옆에 박혀있는 검은 글씨를 바라보며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수고하셨어요. 어떻게든 제가 말씀 드렸던 대로 스카우트 하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절대 거론하시지 마시구요.”'“알겠습니다, 실장님”'“그만 나가보세요, 참.”'“네?”'“다음부터는 차 대기시키지 말고 제가 운전할 차를 준비해주셨음 좋겠네요.”'“아, 예. 알겠습니다.”'세호가 문을 열고 나가자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에 종이를 들고 그는 창가로 가서 섰다. 창문 너머로 내리쬐던 햇빛이 그의 머리서부터 아래로 찬찬히 내려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종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 봐도, 아무리 지워보려 노력해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녀를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이유도 모르고 심장에 칼을 박아 넣어야 했던 그녀를 미워서라도 떨쳐 내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숨이 막히고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던 그 시절 난생 처음으로 심장을 통째로 떼어준 아이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도 아무렇지도 않을만큼 열렬히 사랑했던 아이. 적적하고, 고독한 이 세계에서 살아갈 이유를 준 유일한 사람. 그랬기에 더더욱 용서할 수가 없었다. '따스한 햇살너머 그림자 진 도혁의 얼굴위로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