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왜 자꾸 좋아지는 거야.

내가 무슨 짓을…!

침대 끝에 털썩 주저앉은 승원은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우리가 프라이빗 하우스에 없다는 걸 인지한 순간,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없다’에서 시작되어 ‘떠났다’는 아픈 과정을 거쳐, ‘돌아오지 않는다’로 귀결되는 잔인한 방정식. 승원에게만 존재하는 지독한 저주와도 같은 방정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화를 하는 것과 우리가 돌아올지도 모를 주인 없는 방에서 기다리는 것. 우리의 짐이 아직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끝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우리의 움직임이 어둠 속에서 느껴질 만큼 공기는 완연하게 바뀌었다.

우리는 돌아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몸 안으로 흐르는 숨길이 열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야 민망한 자괴감이 승원을 덮쳤다.

너무 많이 전화하지 말 걸… 우리를 보자마자 와락 안는 짓은 하지 말 걸… 얼마나 집요하다고 생각할까. 싫어하진 않을까?

승원은 저도 모르게 우리가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

버건디 슈트는 우월한 피지컬을 거들 뿐,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현실화시킨 승원이 티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나 고고하던 승원은 바에서 숟가락을 흔드는 우리를 보는 순간, 흐트러지고 말았다. 깁스를 풀었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하는 식사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뭘 놀라요? 밥 먹어야죠. 이리 와요.”

승원은 홀린 듯이 우리의 손짓에 끌려 우리에게 다가갔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조식이 차려져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와… 오늘 왜 이렇게 예뻐요?”

승원을 한눈에 담은 우리가 작품을 보듯 감탄했다.

“예쁘다니.”

“헤헤, 얼굴이 옷 색깔처럼 약간 붉은 게 예뻐 보여서 그런 거죠.”

얼굴이… 빨개? 당황스러움이 훅 치고 들어왔다.

정작 승원을 당황스럽게 만든 장본인은 커피가 가득 든 머그잔을 승원의 앞으로 밀었다.

“식기 전에 커피부터 마셔 봐요.”

기분 좋게 퍼지는 커피향이 승원의 이성을 불러왔다. 마침 커피가 필요한 참인데 잘됐다.

짙고 검은 액체의 유혹은 거부할 수가 없다. 승원은 커피를 조금 머금고 입안에서 굴려 넘겼다. 묵직한 바디감. 진하고 고소함 끝에 신맛이 살짝 감도는 깔끔함이 맘에 들었다.

커피 한 모금에 당황스러움이 진정되었다. 커피 두 모금에 온몸을 타고 흐르는 카페인이 빠르게 뛰는 심장의 이유가 되었고, 커피 세 모금에 맘이 평온해졌다.

굳어 있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승원을 보면서 우리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진해졌다.

“커피 내려주겠다던 약속, 지켰어요.”

손가락으로 승원이 들고 있는 머그잔을 가리켰다. 3년간의 카페 알바 경력을 이렇게 써먹을 수 있다니. 역시 쓸데없는 일이란 없다. 솔직히 조금 뿌듯하기까지 했다.

“맛있게 마셔주니까 되게 기분 좋다… 근데 어젯밤에 말이에요.”

쿨럭쿨럭! 불시에 던져진 어젯밤이라는 말에 사레에 들린 승원이 기침을 해댔다.

“천천히 먹지. 커피 마시다 체하면 약 없을 걸요.”

더 놀란 우리가 입을 막고 쿨럭거리는 승원의 등을 두드렸다. 겨우 기침이 잠잠해지자, 승원이 멋쩍게 말을 했다.

“어젯밤엔… 내가 좀 과했습니다.”

“뭐가요?”

“…전화….”

가만 생각하는 듯 보던 우리가 뭔가를 생각해 냈다.

“아! 부재중 열여덟?”

그래… 열여덟 통이나 했지…. 안 그래도 승원은 내내 후회했다. 싫겠지. 8년 전에 서영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되게 많이 걱정됐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