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스 줄까?”'“아니요.”'하람이 책에서 눈을 들고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양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잔잔하게 퍼졌다. 아이는 긴 비행시간 동안 지루해하거나 짜증 내는 기색 없이 혼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았다.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듯 조용했다. 그러나 그가 말을 걸면 밝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하람은 천성이 밝은 아이였다. 같이 있으면 그의 기분까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람을 지켜보는 희중의 얼굴에 흐뭇함이 번졌다.'“목마르세요? 물 가져다드릴까요?”'“아냐, 됐어.”'영민한 눈동자가 그를 살피며 물었다. 눈치가 보통 빠르지 않았다. 희중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듯했다. 꼬마 숙녀가 그의 마음을 홀랑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하니 아주 예뻤다. 단정한 옷차림만큼이나 말과 행동이 차분하고 예의발랐으며, 머리도 똑똑하고 생각이 깊었다. 어디 한 군데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양 회장의 눈동자에 회한과 고통이 스쳐 갔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아픔이 몰려왔다. 희중은 가슴 부근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아프신 거예요?”'“아냐.”'“약 드릴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물 가져올게요.”'“별일 아니래도. 정말 괜찮아.”'너무나 맑은 눈동자로 묻는 아이의 얼굴은 진심으로 걱정이 가득했다. 희중은 가슴이 묵직하니 뻐근했다. 그것은 기분 좋은 고통이었다. 아내가 죽은 후 무감각하게 살아온 그의 삶에 하람은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비록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살붙이처럼 그를 걱정하고 챙겨 주는 마음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아프시면 말씀하셔야 돼요? 할머니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오냐, 꼭 말하마.”'그러나 하람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그를 살피는 눈동자에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박 원장이 그의 심장병에 대해 단단히 일러둔 모양이었다. 물론 박 원장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희중은 요즘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걱정시키나 싶어 어른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정말 괜찮으신 거죠?”'“그럼.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미안해서 어쩌지?”'“아프시지 마세요. 건강하셔야 해요.”'“오냐.”'아이가 작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가슴에 전해지는 하람의 체온이 따스했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끌어안는 아이의 행동에 희중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가슴에 맞닿은 온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사람의 온기가 이렇게 좋을 줄 미처 몰랐다. 마치 영혼이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안심시켰다.'“딸이 아빠를 끔찍이 생각하네.”'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보며 말하였다. 아마도 그와 하람을 부녀지간으로 여긴 듯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웃음을 삼켰다. 미국에서부터 자주 듣던 말이라 웃음부터 나왔다.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기분이 묘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미국의 경우, 외국인의 눈에 동양인의 생김이 같아 보일 수 있겠단 생각을 했지만 한국 사람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늦둥인가 보네.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어.”'“네. 요즘 요 녀석 보는 맛에 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