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룡의 성역 전체를 뒤엎어 놓았던 모종의 사태가 일단락된 이후, 황궁은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 메워졌다. '궁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으며, 직무상 매일 같이 입궁해야 하는 자들은 일을 처리하기 무섭게 출궁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비록 누구 하나 감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지언정, 그 원인이 황제궁에 있음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운인들과 은밀하게 일을 도모하여 두 번째로 황궁을 탈출하려 했던 홍조의 여인, 서문시란. 그리고…… 진신(眞身)이 찢겨진 충격으로 내상을 입은 와중에도 친히 출궁하여 그녀를 붙잡아온 황제. '일전에도 궁주가 한 번 도망치려 하였다가 미수로 그친 일이 있었지만, 이번 사건은 그때와는 정도가 달랐다. '지하 밀실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신물이 훼손된 데다, 일시적이나마 황궁을 둘러싸던 수기의 결계마저 사라졌던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황궁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태무제가 한운의 궁주를 죽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귀에 들려온 결과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천휘는 늘 그랬듯 황제궁의 제 침소에 시란을 데려다 놓았고, 여느 때처럼 우원궁의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았다. '한운의 문제가 거론될 때만큼은 다소 날이 서긴 하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창룡의 황제 그대로인 모습. 그러했기에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시란이 또다시 제 곁에서 도망쳤음을 알게 된 순간 천휘의 내부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렸으며…… 그 이후, 그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 여인에게 제 안에 들어찬 핏빛 광기를 쏟아내고 있었음을.'''어둠이 드리워진 황제의 침소에는 서늘한 냉기가 가득했다. 짙은 휘장으로 가려진 침상에서 연신 거친 숨소리와 질퍽한 소음이 흘러나오는 것과는 정반대의 공기. '바람마저 감히 다가서지 못한 채 도망쳐 버린 침소 안에 서려 있는 것은 분노, 오직 소름 끼치도록 차디찬 분노일 뿐이었다. '“흑, 흐윽……!”'사내가 격하게 진퇴를 거듭할 때마다 그 밑에 짓눌려 있던 여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일말의 쾌감도, 가슴 떨리는 희열 하나 없이 그저 고통과 괴로움일 뿐인 행위. '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까지 하나가 되었던 그때 이후, 더 이상 황제의 손길에 반응하지 않게 되어 버린 시란의 몸은 바짝 마른 샘 그 자체였다. '그러나 천휘는 자신의 불칼로 물기 없이 굳어진 여인의 땅을 거칠게 헤집었고, 육신의 욕망이나마 충족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비단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시란을 제 침상에 묶어 둔 채 쉴 새 없이 그녀를 가졌고, 그녀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입 무거운 궁녀 두 사람이 하루에 세 번 시란에게 음식을 먹이고 몸을 씻겨 주는 것만이 전부였다. 천휘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시란을 보지 못하게 했으며, 자리를 비울 적에는 결계를 쳐두어 그 누구도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게끔 했다. '단 한순간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미칠 듯한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깨어져 버린 심장. 육신의 정욕은 그것들의 천만분지 일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그녀를 가져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고, 시란을 붙잡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더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내부에서 격하게 꿈틀거리는 이 핏빛 광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밑도 끝도 없는 욕정을 채우던 것도 잠시, 천휘는 그가 남긴 흔적들로 가득한 여인의 몸을 내려다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열꽃처럼 새하얀 피부 곳곳에 피어오른 붉은 상흔들. 다름 아닌 그녀가 그의 것이며, 그의 손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서 시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또 하나의 상흔을 남겼다.'불꽃같은 통증과 함께 그가 뿜어낸 광기가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순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그만…… 더는 그러지 말아요……. 당신 또한, 괴로운 거면서…… 아앗……!”'부서질 듯 떨리는 시란의 목소리는 어느 틈에 숨 막히는 비명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두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친 천휘가 이전보다 깊숙이 시란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는 감정 없는 눈으로 그녀의 몸속을 할퀴어댔고, 가늘게 숨을 헐떡이는 여인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내게 명령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서문시란. 괴로운 건 너뿐이지, 내가 아니다.”'“거짓…… 말…… 흐윽……!”'그렇게나 아픈 눈을 하면서, 왜 거짓을 말하는 건가요……? 시란은 멍하니 천휘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흐를 눈물조차 없이 말라 버린 흑요석빛 눈에 비친 것, 그것은 달빛을 등진 채 그녀를 탐하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었다. '어둠에 파묻힌 그의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그녀는 그 속에서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한 사내의 모습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적 그러했듯 감응력으로 그의 속을 읽어내지 못할지언정, 그가 철저히 냉혹한 맹수의 얼굴을 가장하며 그녀를 짓밟을지언정…… 시란은 천휘 또한 그녀 못지않게 힘들어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그때, 이 사내에게서 떠나지 말았어야 했었다. 유현에 대해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그것을 넘겨 버린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실수였다. '어느 틈에 이 창룡의 땅에도 그녀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들이 있었음을, 그녀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기억했어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찰나의 순간, 찌를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사내의 숨결이 시란의 귓가를 스쳤다.'“내게 안기는 것을 재미없어 하는 건 여전히 그대로군. 그간 비교 대상이 없어서 으레 그러려니 했건만, 지금 널 안고 나면 다른 계집들을 한 번 시험해 봐야 하는 건가.”'“하, 하윽……!”'쉴 새 없이 가슴을 압박하는 사내의 무게에 숨이 막혔고, 일말의 배려 없이 격하게 밀고 들어오는 그의 일부 때문에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관계인지, 이제는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시란을 괴롭게 하는 것은 그녀에게 상처 주며 그 스스로도 피 흘리고 있는 천휘의 모습이었다. '그녀로 인해 서서히 변해 버렸으며…… 그 핏빛 밤 이후 그녀 때문에 반쯤 미쳐 버린 사내. 그의 내부에 갈무리되어 있던 어둠을 끄집어낸 것은 다름 아닌 시란이었다. 그렇기에…… 천휘를 볼 때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절정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황제가 시란의 몸속 깊숙이 파정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뜨겁게 달구어진 사내의 씨앗은 한껏 파헤쳐져 있던 여인의 샘을 가득 메웠다. '땀에 젖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천휘가 거친 숨결을 내뱉는 사이, 그녀는 흐려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달빛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플 만큼 환하구나.’'미쳐 버린 달빛, 미쳐 버린…… 사랑. 갈 곳을 잃은 채 어그러진 마음들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시란은 달빛을 눈 속에 머금은 채 서서히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서라의 사신들이 황궁에 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감히 한운 왕실과 동조하여 음모를 꾸민 세자의 죄를 빌고 그 추종자들의 목을 바치기 위함이었다. '왕의 동복아우라던 왕제(王弟) 운장형은 황제 앞에 아홉 번 절했고, 황금으로 만든 상자를 바쳤다.'“존귀하신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세자, 아니 죄인과 밀약을 나눈 자들의 수급이옵니다.”'천휘는 내관이 가져다 바친 명단을 냉연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서라의 왕이 최상의 예를 갖추어 친히 작성한 명단에는 세자의 외가 쪽 무관들과 신분 높은 고관대작 몇몇의 이름이 써져 있었다. 하지만…… 저들이 적당히 아무나 죽이고 일을 매듭지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내관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황제의 뜻을 알아차린 내관은 그 즉시 황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한순간, 피비린내가 번지면서 지켜보던 자들의 시선이 굳어졌다.'“……!”'상자 안에 들어 있는 목은 모두 일곱이었다. 하나 같이 짓이겨진 살점과 피를 뒤집어쓴 채 두 눈을 부릅뜬 수급들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어지간해서는 쉬이 놀라지 않는 수장군 가환조차 시선을 돌렸고, 내관들 중 몇몇은 애써 토악질을 참기까지 했다.'비단 그것은 수급을 가져온 사신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 정도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 사신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서라인들 중 유일하게 동요하지 않는 것은 왕제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천휘는 냉기 가득한 음성을 흘려보냈다.'“전혀 놀랍지 않은 표정이군. 이유가 무엇이더냐.”'“저희 왕께서는 이자들을 처형하실 적에 모든 왕족들을 불러들인 바 있었습니다. 해서 소신 또한 전부 보았고…… 새삼 놀랄 것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