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방의 찬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눈 덮인 황량한 벌판에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호령이 칼바람에 찢긴 얼굴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아픔으로 차올랐다.

챙챙. 챙챙. 칼이 부딪칠 때마다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달리는 말발굽에 내 아까운 병사들의 육신이 짓밟혔다.

여기가 끝인가? 정녕 여기가 나의 무덤인가?

칼 든 자에게 전장은 언제나 다가오는 죽음. 작은 육신 쓰러져가는 것이야 어차피 정해진 운명. 그러나 우리가 이곳을 지키지 못하고 쓰러지면 이 땅과 백성은 어찌 되는 것인가?

눈물이 피와 같이 붉었다.

칼의 무게가 이토록 버거운 날.

적군의 칼날이 갑옷을 뚫고 들어와 살갗을 난도질했다. 백전백승(百戰百勝)으로 전장을 누비던 장수, 강호령의 마지막이 흰 눈발처럼 어지럽게 다가왔다.

이제 겨우 서른이나 열이 될 무렵부터 죽음 걸린 전장을 누볐으니 그 세월이 벌써 20년. 언제나 그 순간이 마지막인 듯 비장한 눈빛으로 전장에 나아갔고, 언제나 승전보를 높이 치켜들고 금의환향(錦衣還鄕) 했다. 그 숱한 날들이 꺼져가는 찰나.

-불가하옵니다. 전하! 출전의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젊은 장수, 강호령은 감히 지존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이 전쟁의 불가함을 토로했었다.

북방의 날씨는 칼날과 같이 매섭다. 그 혹한을 견디기에 신의 병사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싸우기보다 저들과 협상하는 것이 먼저이겠다. 병법에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지 않았던가! 또한 기마병으로 무장한 저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에 그 허허벌판은 이미 죽음의 터전이다.

오랑캐들이 그물을 치고 기다리는 사지(死地)로 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저들은 이미 강하다. 오래도록 분열되어 있던 북방을 통일한 막강한 군대다.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신의 계략과 계책에 따라 전쟁의 판세를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출전의 명은 거두어 주시라.

간절함을 담아 고했다. 왕은 지엄한 명을 거두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도 그의 출전을 종용했다. 미개한 오랑캐와 무슨 대화가 필요한가. 그저 쓸어버리면 그만이라 소리를 높였다. 조정 대신 누구도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방을 통일한 저들의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힘이 이미 막강해졌음에도 노략질이나 일삼는 미개한 부족으로만 여겼다.

묵직한 칼의 무게 한번 느껴본 적 없고, 온몸을 쓸어가는 전장의 붉은 기운 한번 체험한 적 없는 저들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저 탁상공론(卓上空論)이나 일삼는 저들은 20년, 죽음 앞에 잔뼈가 굵은 장수의 고함을 묵살했다.

-아니 되옵니다, 장군. 출전은 불가하옵니다. 이는 간악한 차성진의 모략이옵니다.

누구보다 강력한 어조로 호령의 출전을 종용한 것은 차성진이었다. 전장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차성진. 그자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자가 주상전하의 성심(聖心)을 흐리는 것이옵니다. 장군을 사지로 몰아넣고자 하는 그자의 계략이옵니다.

부장, 윤두호가 울분에 차 소리를 질렀다.

차성진. 마흔을 넘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나 매번 갓 서른인 호령에게 밀렸다. 왕의 신임은 늘 강호령에게 있었고 대장군의 막중한 지위도 그의 차지였다. 전례 없던 파격 승진. 시기해 달려드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다고 군사들마저 사지로 몰아넣으려 하다니. 차성진, 그자를 어찌 장수라 하겠는가. 자기 잇속에 눈먼 소인배인 것을.

-전하의 명이다. 나는 주군의 명을 따를 뿐. 장수가 어찌 그 명을 거역하겠느냐!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게다가 군사는 겨우 5천입니다. 5천을 내어주고 5만의 적을 맞아 싸우라니. 오랑캐라 깔볼 일이 아닌 것을. 이미 북방을 통일하고 서역으로까지 그 세력을 뻗치고 있는 저들이옵니다. 얕잡아 볼 일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장군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한데도 5천의 아까운 목숨을 사지로 끌고 가실 작정이십니까? 대제학 대감과 상의를 해 보시는 것이…….

-살아서 돌아와야지. 기다리는 이들이 있으니. 우리는 늘 그래왔지 않는가!

-장군.

-불가하다는 생각은 버리게. 그대와 내가 이길 수 없다 여기면 정녕 어찌 이기겠는가. 이길 방도를 찾아야지. 그것이 그대와 내가 할 일이다.

왕명의 지엄함을 거역할 수 없었던 장수의 칼은 군사들을 이끌고 무거운 사지로 들어섰다.

밤을 새워 전략을 짜고 계책을 세웠다.

내 병사. 내 나라. 이 땅의 백성.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무게로 장수의 어깨가 짓눌렀다. 열악한 환경에도 일진일퇴(一進一退)를 반복하며 기어이 지키고자 했다. 또한 도성에 장계를 수십 번 보냈다. 더는 버티는 것이 불가하니 종전하고 협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만이 이 전쟁에서 실리(實利)를 취하는 방도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무심한 질타였다. 그의 무능을 탓하며 나가 싸워라 압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