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자살을 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전남편과 강 회장. 그 두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면 그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박인환, 당신의 전남편을 만났습니다.”'“뭐, 뭐라고?”'“다, 들었습니다.”'“다 들어? 뭘? 도대체 뭐에 대해서 다 들었는데!”'“수도 없이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거.”'“그, 그리고?”'그녀는 궁금했다. 혹시 자신이 임신했었다는 것까지 들은 건 아닌가 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그리고, 당신이 내 아이를 가졌었다는 거.”'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렸다. 이 사람에게만은 그 끔찍했던 시간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알고 있었다. 7년 전 그녀가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몰랐습니다. 난…… 난, 당신이 그렇게 끔찍한 시간을…….”'“알았으면?”'“…….”'“알았으면 뭐가 달라지는데?”'그가 자신의 지난 시간을 알아 버렸다는 생각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주환의 몰랐다는 말에 더 화가 났다.'“알았으면 뭐가 달라지냐고!”'“……그렇게, 당신을 떠나지는 않았을 겁니다.”'“하, 하, 하하하. 웃기고 있네. 그렇게 떠나지 않으면? 당신이 뭘 할 수 있는데? 나와 결혼해서 그 아이를 당신 아이로 키우기라도 하려고? 그러기도 전에 내 남편이 당신을 간통죄로 감방에 처넣었을걸.”'차가운 그녀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미안하다는 말조차, 내겐 사치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겠지?”'“……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먼저 떠나겠습니다.”'순간 그녀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는 당연히 떠나야 했다. 자신에게 이런 상처를 남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이 한국 땅에서 살아간다면 그는 정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떠난다는 말에 그녀의 가슴이 왜 이렇게 먹먹해지는 걸까? 그녀는 그런 자신을 다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제, 다시는 볼 일 없겠죠?”'“……이제부터라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행복? 그딴 거 시궁창에 집어 던진 지 오래예요.”'“유라 씨…….”'“다시는, 만나지 마요, 우리.”'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흘러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서 그에게 이별을 고한 후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예상치 못한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이제, 끝이야. 칠 년 전 그랬던 것처럼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이주환, 그는 칠 년 전에 죽은 사람이야. 내 아이도, 내가 사랑했던 남자도 죽었어. 이제…… 나만 가면 돼. 그때가 언제이든.’'그녀는 그렇게 모래사장을 걸어 나가다가 근처 포장마차로 들어가 술을 주문했다.'“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네.”'그가 수면제와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면 그녀는 술을 달고 살았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셨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하지만 날이 밝고 나면 잠시나마 잊었던 고통은 또다시 그녀의 숨통을 죄어 오곤 했다. 그녀는 아주머니가 소주를 가져다주자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들이켜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망각한 지 오래였다. 오늘 밤도 이 술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녀는 소주 2병을 들이켠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취한 건 아니었다. 7년 동안 마신 술의 양에 비하면 소주 2병은 새 발의 피였으니까. 그렇게 술을 마신 그녀가 호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갑자기 어둡던 도로에 따가울 정도의 불빛이 생겨났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녀가 빛이 비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뭐, 뭐야?”'그리고 시선을 돌린 순간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자동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란 그녀의 발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녀는 달려오는 차를 마주 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찢어 놓을 때까지.'“안 돼!”'끼이익!'쾅! 퍽!'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던 그녀의 몸은 강한 힘에 의해 떠밀려 나갔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순간 그녀의 귀에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한 남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