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 청춘블루스

또각또각.

복도 저편으로부터 들려오는 하이힐 굽소리.

하이힐을 동경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여자의 자존심은 높은 하이힐 끝’이라던.

“잠깐만요!”

엘리베이터 닫기 버튼을 누르려던 나의 손이 멈칫했다. 천천히 닫히던 문이 다시 열리며 우아한 굽 소리와 함께 깔끔히 차려입은 여자가 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감사합니다.”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발끝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여자의 하이힐에 눈길이 머물었다.

면접을 본 회사에서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나는 하이힐을 샀다. 앞코가 뾰족하고 아찔한 높이의 검은 하이힐.

그러나.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기엔 하이힐은 불필요-불편-했고 내 굽 높이는 점점 낮아져, 이젠 땅바닥에 납작 달라붙은 단화만이 나의 두 발에 덩그러니 붙어 있을 뿐이다.

[7층입니다.]

문이 스르르 열리고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

타박타박.

복도를 걸어도, 걸어도 아무런 소리조차 나지 않는 내 나지막한 단화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마치 내 신세 같아서.

……동경했다.

하이힐만큼 높은 세계에 사는 그들을. 선명한 존재감을 알리듯 복도를 울리며 걷는 그들의 삶을. 어렸을 때는 그렇게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도, 그들처럼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홍주 씨. 여기 차 좀 내주세요.”

“네.”

“홍주 씨. 이거 복사 두 장만.”

“네.”

가끔 나는 내가 복사기가 된 것 같은 상상을 한다. 아니면 과일을 깎는 칼. 그것도 아니면, 커피를 휘젓는 스푼.

중견 기업 파견 근로자로 근무한 지 1년, 나의 업무는 서무 및 사무 보조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위에서도 언급한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

나른한 오후. 이 과장님이 시킨 일을 마무리 짓고 기지개를 쭉 켜며 참았던 하품을 쏟아 내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과 기분 좋게 부른 배. ……잠자기 딱 좋은 환경이네.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부스스 일어나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음료수 자판기 앞. 나름의 치열한 고민 끝에 마침내 밀크 커피로 골랐을 때쯤 나는 내가 빈손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머니를 아무리 뒤적여 봐도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나오질 않는다. 얕게 한숨을 쉬며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시리게 푸르른 하늘이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큰 창을 가득 메우는 넓고 넓은 하늘. 단단한 유리창 너머로 시원한 바닷물이 찰랑댈 것만 같았다. 사무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도 잊은 채,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 속으로 깊이 빠져들던 그 순간.

“그래요?”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하.”

낮게 퍼지는 청량한 웃음소리와 봄바람과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 딱히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눈이 부시게 웃고 있으리라.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멀어져 가나 했더니 등 뒤로 단정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요?”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말을 건네는 그를 보면서 당황한 나는,

“그게, 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는데. 빈손으로 나와서…….”

하며 바보처럼 주절댔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이며 물었다.

“밀크 커피 괜찮아요?”

“아, 네.”

그는 동전 몇 개를 꺼내 자판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내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동안 커피는 감질나게 종이컵에 채워졌다. 이제 가져가라는 듯이 빨간 불이 꺼지자, 그는 종이컵을 꺼내 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나의 말에 그는 말갛게 웃었다. 해사한 그의 얼굴은 소년의 것 같았다.

“총무부에 이홍주 씨 맞죠?”

“……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실은, 가슴이 떨렸다. 그가 나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제 이름은 민희원이에요. 인사부에서 일해요.”

알아요. 민희원. 잘 알고 있어요.

“네.”

“저번에 보니까, 홍주 씨 우리 집 근처 버스 정…….”

“민 대리님!”

우리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구제희가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구제희는 나를 향해 머리를 까딱 숙이며,

“안녕하세요. 이홍주 씨.”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