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마닐라.”'“칠레?”'“칠레…… 응…… 뭐였지?”'“산티아고!”'“아…… 맞다. 산티아고.”'가은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 '“아이 참, 엄만! 몇 번을 가르쳐 줬는데 또 헷갈려?”'그녀의 아들, 로운은 요즘 나라와 수도 이름 외우기에 빠져있었다. 해서 엄마에게도 같이 외우도록 강요 아닌 강요를 했다.'“미안.”'“엄마, 또 다른 데 정신 팔고 있었지?” '가은은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다그치는 아들을 보자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뜨끔하기도 했다. 조그만 녀석이 귀신같이도 알아차린다 싶었던 것이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회사일로 가득했다. 1개월 동안의 연수기간이 끝나고 오늘부터 발령 받은 부서에 첫 출근을 하게 된 것이다.'“어떻게 알았어?”'“치, 하루 이틀인가 뭐. 내가 엄마 보호자잖아. 척 보면 다 안다구.”'가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의뭉스럽게 말하는 아들이 기특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통통한 볼을 꼬집어 주었다.'“요, 요 쬐그만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아야! 엄마, 아파!”'그녀가 입사한 곳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로펌 ‘우신’이었다. 변호사만 200여명에 회계사, 변리사, 세무사까지 합쳐서 대략 500여명이나 되는,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물론 가은은 그곳의 말단 경력직 여사원이었다. 그러나 보수만 해도 전에 다니던 직장의 두 배에 가까웠고, 직원들을 위한 복지 시설도 여러 가지로 잘 되어 있는 회사였다. 고졸학력에 싱글맘인 그녀로서는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는 것 도 쉽지 않았는데 ‘우신’에 입사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물론 그녀가 우신에 입사하게 된 것은 어떤 사람의 입김이 작용해서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가은은 자존심 때문에 그 사람의 도움을 거절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후, 당장 아이와 둘이 먹고 사는 문제부터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이 있기도 했다. 학력이나 다른 부수적인 조건을 제외하고 업무능력만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 말이다. 다행히 우신은 철저한 능력중심의 회사라고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들어가고 나서 실력으로 부딪쳐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첫 출근이다 보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로운아! 이로운!”'로운과 함께 교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은색 승용차의 문을 열고 깜찍한 여자 아이가 내렸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로운과 같은 반이 된 다슬이었다. '순간 가은은 아이가 손을 슬그머니 놓는 것을 느꼈다. 여자 친구 앞이라 창피하다는 건가? '“그럼 엄마 갈게. 친구들 하고 잘 지내, 선생님 말씀 잘 듣고.”'“응, 엄마도.” '대답을 한 후 로운은 얼른 다슬에게로 뛰어갔다. 올망졸망한 녀석들 둘이 나란히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가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편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던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이렇게 제 품을 조금씩 벗어나겠지 싶었다. '그때 저만치 앞에 가던 로운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씨익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엄마 서운해 하지 말아요.’ 하는 것 같았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가은은 웃으며 머리 위로 하트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로운도 따라서 크게 하트모양을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선물을 받은 것 마냥 가은은 가슴이 뿌듯해서 돌아섰다. 긴장되는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출근을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기는데 다슬을 내려주고 서 있던 차와 마주쳤다. 운전석에 앉은 젊은 여자가 아마 다슬의 엄마인 모양이다. 아이들 일로 몇 번 통화를 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보긴 처음이라 살짝 목례를 해 보였다. 그러나 차는 그대로 가은의 앞을 지나가 버렸다. '‘못 본 건가?’'예전에 통화를 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다슬 엄마의 태도는 왠지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예전 일까지 떠오르자 살짝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바쁜 출근시간이다 보니 그 이상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며 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마침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오늘부터지?] '대뜸 들려온 귀에 익숙한 거만한 목소리. 가은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실례지만 누구시죠?”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상대편에서는 금방 정중하게 목소리의 톤을 바꿔서 말해왔다.'[안녕하십니까, 유지훈입니다.]'가은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대꾸했다. '“아, 유 변호사님. 그런데 어쩐 일이시죠?”'[지나던 길인데 들를까 해서요.]'“어머, 어쩌죠? 저 벌써 지하철 탔는데.”'상대편에선 더 이상은 신사적으로 굴 수 없다는 듯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이가은, 정말 번번이 이럴래!]'“죄송합니다. 이유 없는 호의는 거북해서 받지 않으려고요.”'가은은 매정하게 핸드폰을 끊었다. 지금쯤 지훈이 혼자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그의 집까지가 코앞인 지훈이다. 딴에는 태워다주려고 여기까지 돌아왔을 텐데. '하지만 가은은 아직 그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과오들. 그로 인해 그녀는 9년이란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만 했었다. 그럼에도 참회하는 그를 보자 허탈하리만큼 너무도 쉽게 용서가 되었다. 그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래서 가은은 그를 좀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의 진정성을. 예전과 완전하게 달라진 유지훈이라는 인간을. '아니, 사실은 두려워서 일지도 몰랐다. 그가 베푸는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열락의 달콤함에 빠져들어 다시금 스스로를 잃게 될까 봐. 그의 우리 안에서 사육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 봐. 그렇게 다시, 오직 그 사람만을 원하는 바보 같은 계집애로 돌아가게 될까 봐. '이제 그녀는 한 아이를 책임지는 엄마였다. 어느 때보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 결정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특히 그를 받아들이는 일은 아이의 인생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까. '유지훈……. '하지만 그 이름 석 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은은 어느새 온몸에 묘한 열기가 퍼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다가올 때의 두근거리던 긴장감. 후각을 자극하는 야릇한 향기. 옴짝달싹 못하도록 자신을 움켜쥐던 크고 강인한 손. 제 온몸을 훑고 탐하는 그의 뜨거운 입술…….'띠리리잉…… 띠리리링…….'아침부터 한심한 생각을 하는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플랫폼 안으로 기다란 지하철이 미끄러지듯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이가은, 정신 차려!’'지훈과는 좀 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어제까지 연수를 받던 A블록 사무실로 종종거리며 걸어가던 가은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불현듯 자신이 배치 받은 회계 2팀은 B블록 3층에 있다는 사실이 기억난 것이다. 가뜩이나 출근 시간도 촉박한 상황에 이런 실수라니. 하는 수 없이 2층에서 A블록과 B블록을 잇는 통로로 뛰어갔다. '허겁지겁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문 앞에서 나오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손안에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톡 떨어지며 플립이 열렸다. 액정화면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며 활짝 웃고 있는 로운과 그녀의 사진이 떴다.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얼른 핸드폰을 주워 들며 가은은 부딪친 사람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어쨌거나 부딪친 건 급하게 뛰어온 자신의 잘못이 컸으니까.'“내일부턴 좀 더 여유 있게 출근 하세요.”'가은은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급스런 양복에 살짝 힘이 들어간 표정이 왠지 자신의 상사일 것 같았다. 첫날부터 찍힌 건가? 하지만 조금 억울했다. 근무시간은 9시였고, 출근 시간은 8시 30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25분이지 않은가? 지각을 한 것도 아니고, 로운을 학교에 보내는 것 때문에라도 더 이상 일찍 출근은 힘들었다. '하지만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법. 힘들어도 당분간은 상사가 원하는 대로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예, 그러겠습니다.”'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그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 여잔가?’'준일은 상큼한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는 가은의 뒷모습을 마뜩치 않게 응시했다.'회계 2팀의 인원이 부족하다고 업무 지원을 요청한지가 벌써 몇 달 전인지 모른다. 그런데 얼마 전에서야 2명의 인원이 보충 될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두 사람의 이력서를 받아 훑어보던 그는 결국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한 사람은 당장 써먹기 힘든 완전 초짜였고, 경력직 사원이라고 들어온 가은은 실업계 고교 졸업에 조그마한 중소기업 경리과를 전전한 이력이 전부였다. '우신은 능력 중심의 회사라 입사지원에 조건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업계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회사이니만큼 일반 사원들조차 최고의 학벌이나 경력을 가진 엘리트들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실업계를 졸업한 애 딸린 아줌마라니. 게다가 미혼모란다. 왠지 안 봐도 뻔한 여자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미치겠군. 마트에서 캐셔를 한 것도 이력이라고 써 넣다니. 허름한 변두리 사무실에 커피나 타러 들어온 것도 아니고 원…….’